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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민 Nov 02. 2023

남편은 결혼을 후회했다


“우리 집 구경 갈래?”     


22살 남자친구의 자취방에 처음 발을 들였다. ‘라면 먹고 갈래?’라는 야릇한 농담을 던지지 못하는 남자친구는 역시나 순도 100%의 팩트를 건넸다.

‘구. 경. 하. 러. 와.’


특유의 감은 눈을 장착해 나의 손을 이끌던 그의 뜨거운 손은 어쩌면 사심이 가득했을지도 모른다.     

20대 초반의 두 남녀가 맞잡은 손바닥은 이미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고 그날 진정되지 않던 심장소리는 유난히 낯설었다. 촌스러운 청록빛 현관문이 낯선 공기를 인지했는지 모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삐-이-익.     


쉼 없이 뛰던 나의 심장은, 처음 맞이한 남자친구의 자취방을 마주하며 멎었다.







신발장과 거실의 경계를 삼선슬리퍼로 인지할 수 있었다. 마치 레드카펫처럼 나란히 줄을 지은 구겨진 수건과 갓 허물을 벗은 듯한 각양각색의 옷가지들 덕분에 발 끝에 힘을 줘 여백을 찾는데 애썼다.


두 눈을 의심했고, 그를 매섭게 훑었다. 그는 나의 눈빛을 읽지 못했는지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싱크대는 보지 말았어야 했다. 개수대 안의 켜켜이 쌓인 그릇들은 오늘, 어쩌 그 이전에 그가 보낸 시간을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스레인지 위 양은냄비는 개수대에 오지도 못하고 뚝뚝 빨간 눈물자국을 흩날렸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난 청소에, 정리에 진심인 사람이다.






눈에 가시였던 싱크대부터 정리했다. 붉게 물든 그릇은 뻑뻑 문지르고야 본래의 모습을 찾았고, 검게 탄 양은냄비는 아무리 힘을 줘도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스레인지 위 기하학적 무늬로 그려진 그림들은 세제를 묻혀 뻑뻑 닦으니 어느덧 반짝이기 시작했다.


발끝을 간지럽히 옷가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모아, 세탁기에 넣어 그 자리에서 전원을 켰다. 윙윙 소리와 함께 뱅글 돌아가는 모습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낡은 수건을 반으로 쭉- 찢어 방 끝 모서리부터 두 손으로 힘껏 닦아 내려왔다. 그리고 맞이한 신발장에서 더 힘껏 닦아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선슬리퍼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일련의 과정을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던 그의 눈빛은 더 초롱초롱 빛을 내고 있었다.


‘집이 이게 뭐야’라는 잔소리에도 내 말이 귀에 안 들리는지 ‘사랑한다’며 해맑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런 우린 어느덧 10년 차 부부이다.          







어김없이 돌아온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요리에 소질이 없는 난, 하루 중 가장 부담이 되는 시간이다. 오늘은 뭘 해 먹을까 고뇌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본 그는 배달어플을 켰고,  의욕 없는 엄지손가락의 움직임에 진심이 듬뿍 담긴 혼잣말을 보태었다.


“요리 좋아하는 여자를 만났어야 했는데.”
“어쭈. 나도 키 큰 남자 만났어야 했는데!!”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고, 피식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 그래도 제육볶음은 잘하잖아. 그지?”
“나도 마음은 크잖아. 여보 성격 감싸줄 수 있는 남자 나밖에 없을걸?”
“인정!”

     





생각이 복잡할 때, 주변을 정리하는 것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습관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 중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한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은 미련 없이 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들을 눈에 띄는 곳에 두고 활용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신기하게 삶도 정리되었다.     


비울수록 채워지는 이 기분에 매료되, 난 정리를 끊을 수 없다.







"여보. 여보 쿠킹클래스 다녀볼래?"

"갑자기?"

"여보 미각이 뛰어나니깐 분명 좋은 요리사가 될 수 있을 거야. 박셰프"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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