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통

분노

간극이 큰

by 김혜민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는 부모들은 처음으로 맞이하는 고통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쁜 내 아이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만큼 잔인한 것이 없죠. 부모이기 전에 사람인지라, 받아들이고 헤쳐나감에 있어서 속도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저희 또한 그러했습니다.


주말 아침, 아이는 여전히 거실에서 혼자 웃으며 자기 세상 속에 빠져있다.

동물 이름을 하나씩 나열하며 즐거워하는 아이, 36개월이 가까워지던 때이다.

비록 일방적 혼잣말이었음에도, 무언가를 발화한다는 것에 감사한 시기였다.

(지연반향어 였을까.)

나는 매 순간 긴장의 손길을 놓지 않는다. 아이의 외마디에 클랙슨을 누를 틈도 없이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1회성 상호작용을 위해서.

그것이 단순 메아리 일지라도.


그 소리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남편은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매서운 눈빛으로 아이를 지켜본다. 거실을 가득 채웠던 따뜻함은 어느새 먹구름 가득한 회색빛 공간으로 탈바꿈된다.

그 살얼음 위, 차가운 공기에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다.


눈앞에 가져다가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신난 아이 손을, 거친 손으로 제압함과 동시에 신명 나는 독설이 뒤따라 붙는다.


이런 애랑 뭘 할 수 있는데.
백날 알려줘 봐라.



우린 분노의 칼날을 서로에게 겨눈다.

그 서슬 푸른 칼날이 서로의 목 가까이까지 왔다.

어쩌면, 그때 선택을 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베든, 너와의 관계를 베든.






우리의 가장 큰 힘듦은, 지속된 충돌이 아니었다.


부딪힌 부분을 서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엉퀸 실타래를 풀려고 조차 시도치 않는다는 것,

그 주위만 맴맴 돌고 있다는 것.


어쩌면 정작 가장 힘든 건 아이였음에도, 그 아이를 앞에 두고 앓는 소리만 나불나불 지껄이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답답함만 내세웠다.



불같던 주말은 지나가고 적막한 시간이 찾아온다.

우리는 치열한 할큄을 하고서야 각자의 숨 고르기를 할 수 있었다. 힘들고, 고된 시간의 연속이다. 몸과 마음이 지쳐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사람을.


아비로서, 아픈 아이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가슴이 아리다 못해 이내 찢긴다.


잊히지 않는데,

잊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잊은 척 살아야 하는 것인지 난제다.


난 오늘도 마음속, 머릿속에 깊이 새긴다.


그대는 나의 지지자가 아님을.

이제 여자이길 포기하고 엄마로 살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다름을 인지하고, 마라톤 같은 일상이 시작됐다. 그리고 내 삶은 멈췄다.

기다렸던 회사로부터의 공지, 상반기 고충 전보.

(등급 기준별, 고충사유를 고려, 타 경찰서로 전보)


회사를 집 근처로 이동함은,

이제 내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내가 언제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나, 선수칠 필요가 절실했었다.


그 사유서를 절절히 적었다.

‘신청사유 :

미취학의 두 명의 자녀, 그리고 늦된 첫째 아이’

그리고 증빙서류를 착실히 준비한다.

그땐, 특수교육대상자(이하 특교자)로 지정되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던 때이다.

그리고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장애등록 서류 보내주세요.”
“등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왜죠?”
“특수교육대상자의 전제가 장애등록은 아니에요.”
“아, 그럼 치료기록이랑 병원기록 보내주세요.”


특교자라는 타이틀이, 타인의 눈에는 '장애'라고만 보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화가 나 씩씩거리던 나의 외침을 듣던 남편은, 내 가슴에 더 깊은 비수를 꽂는다.


“당연히, 서류상에도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라 적시되어 있으니깐 회사에서 등록을 운운한 거지. 그리고, 진짜 회사에 아이 상태 오픈할 거야?”
“응. 난 숨기고 싶지 않아.”
“너 알아서 해라.”


남편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한다. 그 매정한 대답에 순간을 참지 못하고 되묻는다.


“타인의 시선이 그렇게 중요해?”
“난, 아이를 지켜보는 것 자체가 버겁고 화가 나. 그러니, 관심 끊을래.”


분노가 격이 되는 순간, 그 화가 목구멍 끝자락에 매달려 말문을 막아버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은 더 잔인하게 쏟아낸다.


“장애등록 왜 안 하는 거야? 너 왜 못 받아들이니?”
“누가 못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 넌 도대체 아이를 위해 뭘 하고 있는데?”


타인에게 관대하고, 우리에게 냉정한 이 사람은,

정작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 작고 이쁜 아이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타인의 시선이 그렇게 중요할까.






질퍽질퍽한 짙은 회색빛 갯벌에서,

본인의 2배 이상되는 등껍질을 어깨에 이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소라게가 있다. 뒤쫓아오는 불청객의 발걸음에 서둘러 저먼 바닷속으로 걸어 나간다. 눈에 보일락 말락 하는 저 먼 끝자락으로.


소라게의 등껍질은 무거워도 내려놓지 못한다.

내 몫이니깐.

나의 선택이었으니깐.

행여, 그 짓누르는 무게감이 버거워 껍질을 내려 논들 소라게는 가벼이 떠날 수 있을까.


그 작은 생물에 먹먹한 내가 보인다.


뒤쫓아오던 불청객 앞에 호미를 살짝 내려놔, 벽을 만들어 겁을 준다.

그런들, 소라게의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음을 앎에도 내 마음 편하고자 슬쩍 내려놓는다.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만 쳐다보며 달려가는 너의 외로운 뒷모습에, 난 마음이 시리다.

더운 여름날.


23살 난, 남편과 7년을 연애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당신의 달콤한 말에 선뜻 결정했었다.


그런데


좋은 아버지란 요구가 그리 무거웠던 것일까.

예상치 못한 상황이, 그를 밀어낸 것일까.


우리는 특별한 아이를 키우는 여느 다른 부부와 같이 격렬히 부딪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난 치열하게 외로웠다.




숨 가쁘게 가는 널 일부러 툭 건든다.
떼구르 돌아 몸을 껍데기 속에 감춰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이렇게라도 쉼을 주고 싶었다.




사진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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