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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민 May 22. 2023

고구마 꽃이 피었습니다



“엄마 같이 놀자.”
“무슨 놀이할까?”
“엄마 여기 있고, 기다려.”     


새하얀 벽에 고사리손을 모아 얼굴을 감춘다. 일정 리듬을 흥얼거리며 그 끝이 보이자 시선을 나에게 맞추며 고개를 돌린다. 설렘과 두근거림이 공존하는 그 순간, 아이의 작은 입에서 피어오른다.


“고구마 꽃이 피었습니다.”


5살 아이가 품을 수 있는 언어유희에 난 오늘도 녹아내린다.     


귀여워 어쩔 줄 모르던 난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를 내 품에 가득 채웠다.


“아니야~ 저기 기다려!”


엄마의 사랑보다 게임 규칙을 지키지 않은 엄마의 반칙이 더 신경 쓰이는 시율이는, 작은 눈에 힘을 줘 미간을 움츠린다. 그 모습마저도 사랑스럽다.

아이의 불편해진 심기를 다시 펴주기 위해, 출발선상으로 이동한다. 다시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손짓한다.


“움직이면 안 돼! 시율이가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가야 해. 알았지?”
“응 기억할게. 고구마꽃!”


빈틈없는 원칙주의자 5살 꼬마 소녀에게서, 남편의 향수를 느꼈다.


시율이에겐 지금, 무궁화꽃인지 고구마꽃인지는 중요치 않다. 오빠가 없는 이 시간, 엄마랑 오롯이 눈을 마주치며 주고받는 뒤엉킴에 입가에 미소가 가득이다.


“엄마, 시율이 마음에 기쁨이가 왔어요!”






거실에서 트램펄린을 타며 ‘도라에몽’ 영화를 보던 시후가 헐레벌떡 주방으로 뛰어온다. 그리곤 내가 아니, 에어프라이어 앞에서 발길을 세운다.


“뭐 구워요?”
“무슨 냄새일까요?”
“고구마!     


엄마의 향기보다, 달콤한 고구마의 내음에 매료되어 달려온 것이다.


3살 강원도 외갓집에서 자란 시후는 감자보다 고구마를 더 좋아한다. 그 어린 꼬마도 혀를 감싸는 부드럽고 달콤함에 풍덩 빠졌다.     

같은 공간에 고구마와 엄마가 함께하여도, 엄마보다 고구마를 더 찾는 녀석에 서운함이 밀려오지만, 그 부드러운 달달함을 익히 알기에 충분히 이해한다.     



180도에 15분, 160도에 10분.

행여나 소중한 고구마가 까맣게 타오르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이리저리 굴러 공들인 25분은, 시후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딩동.

쩍- 소리와 함께 열린 바스켓 속 뜨끈한 고구마를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는다.


“먹을 거야!”
“뜨거워!”
“후 불어주세요.”


엄마는 아이언맨손인 줄 아는지, 그 뜨거운 고구마를 내게 건네는 아이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180도가 넘어가는 뜨거운 열기 속에 갓 나온 고구마를 오른손, 왼손 번갈아 주고받는다. 이따금 그 열기가 벅차 두 손이 겨워질 때 아이의 차가운 귓불에 다가가 그 온도를 식힌다.

오른손에 잡은 고구마, 왼손은 조심스레 다가와 빠르게 그 허물을 벗겨낸다.

노란빛 부드러움이 허리춤에 다가왔을 때 두터운 키친타월을 감아 아이에게 건넨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고구마만 슬쩍 가져가 다시 트램펄린 위로 올라간다.


작은 입술을 오므려 고구마에 다가간다. 후후.

따뜻한 고구마를 야무지게 먹는 입, 그 맛을 아이 눈꼬리가 말해준다.  


"고구마 어때?"
"행복해요. "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엉뚱한 답변에 나도 그 곁에 앉아 고구마를 깐다.


배를 채우는 일, 우리에게 마음을 채우는 일과 같다.







주황빛 호박고구마보다 노란빛 밤고구마가 더 좋고

설탕에 조린 맛탕보다 담백하게 구워낸 군고구마가 좋다.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빛을 내는 것 훌륭하지만

기본에 충실함으로 오는 행복함이 더 소중하다.  

   

어떤 날은 퍽퍽해 목 넘김조차 힘겨울 때 있다.
그럴 때 내 곁에 아기새처럼 짹짹거리며 다가온 아이들에게서 받은 일상의 보답이, 어느새 달달한 부드러움이 된다.


불쑥 나타난 시율이의 고구마꽃처럼 

시후 콧등을 자극한 군고구마의 향처럼.


그렇게 우리 마음에 기쁨이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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