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햐~ 역시 불금엔 치맥이지!”
“그래 그래, 치느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주말을 맞이할 수가 없지. 크나큰 죄야.”
“이 집은 매번 시켜먹어도 어쩜 이렇게 맛있어? 진짜 마약 치킨이라고 바꿔 불러야 해.”
불타는 금요일, 오늘도 역시나 유나와 은수, 서인은 함께 모여 치킨과 맥주를 즐기고 있다.
셋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사이다. 유나와 서인은 초등학교 때 한 동네에서 같이 살았는데, 어느 날 유나네가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겼다가 고등학교 때 다시 만났다. 그리고 서글서글한 은수가 같은 반이 된 둘에게 다가와 말을 붙이면서 셋은 10년이 넘게 절친으로 지내는 중이다.
이 집은 유나와 서인이 룸메이트로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가까이 사는 은수도 만만치 않게 뻔질나게 드나들어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사회인이 된 이후로는 불금에는 치맥을 함께 하며 사회 초년생인 서로를 위로하던 게 여태껏 이어져 왔다.
“하아, 나 헤어졌어.”
“김유나, 내가 또 그 말할 줄 알았다. 얼마나 가나 했지.”
“내 마음이 왜 식는지 나도 모르겠다고요. 미친 듯이 활활 불타올라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다가도, 상대방이 이제 나한테 잘해줄라치면 이상하게 내 마음이 식어. 갑자기 단점들이 눈에 쏙쏙 들어와서 견딜 수가 없어.”
“이번엔 뭐가 눈에 쏙 들어왔는데?”
“아니 글쎄, 카톡을 할 때마다 자꾸 글자가 틀리잖아. 처음엔 그럴 수도 있지 싶어서 참았는데, 결국엔 터져버렸어.”
“아니 캔디처럼 참고 참고 또 참지~ 왜 터져버렸대.”
“어쭈, 차은수, 많이 컸다. 너 지금 이 언니 건드는 거니?”
“얘들아, 신성한 치느님 앞에서 이 무슨! 마음 정결하게 드시도록 하여라.”
드르륵.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울리자 셋은 각자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아, 나야. 후우. 헤어진 그 남자.”
울상을 지으며 유나는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은수와 서인은 통화가 길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시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윽, 술이 다 떨어졌어. 아까 쫌만 더 살 걸 그랬어.” 은수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괜히 다이어트하겠다고 덜 집었어.” 서인 역시 아쉬움 가득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유나도 통화 끝나고 나서 분명 한 캔 당길 텐데..”
“내가 얼른 나가서 사 올게. 편의점에 뛰어갔다 오면 되지 뭐. 불쌍한 유나 씨를 위해서 이 한 몸 희생하리~”
“오! 역시 의리 하면 윤서인! 얼른 다녀오시게. 나는 냉장고라도 뒤져서 안줏거리를 더 만들어봄세.”
서인은 지갑을 챙기고 얼른 집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에서 계산을 하고 맥주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 하얗고 둥근달이 까만 하늘 속에서 가만히 서인을 보고 있었다. 서인이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달도 그녀를 같이 따라왔다.
‘하아, 나도 좀 취하긴 했나 보다. 달이 따라온다고 피식 웃기나 하고. 그나저나 유나는 괜찮은 걸까? 말은 그래도 심란할 텐데..’
서인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시원한 바람에 술도 좀 깨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새카만 밤에 환하게 떠 있는 달을 보니,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릿속으로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달.. 둥근 달이라... 그때도 그랬었지...’
.............
서인은 대학 시절에 부모님 몰래 사진 동아리에 들었다. 부모님은 서인이 좋은 성적으로 빨리 졸업해서 얼른 취업하라며 공부만 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단 한 가지라도 하면서 잠시 숨통이라도 트이고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사진 찍기는 그간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색다른 도전처럼 신선하게 다가왔다.
겁 없이 동아리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처음 본 한 사람의 얼굴. 눈이 부시게 멋지던 건우 선배. 환한 미소가 예뻐서 가슴 설레며 잠들었던 날도 무수히 많았다.
동아리에서도 학과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건우가 서인에게 단 둘이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말을 꺼냈던 그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찬 바람이 불어 코끝까지 빨개지고 손가락이 시리던 날에 바람 쐬러 가자니. 어이가 없었으면서도 순순히 따라갔던 건 어떤 예감 때문이었을까.
그 날 함께 걸었던 수목원 길은 길었다. 추워서 길게 느껴진 건 아니었다.
“춥지?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걸어. 그럼 덜 추울 거야.”
그 말에 설레어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었다. 등 뒤에 있으니 천만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바보처럼 헤실거리며 웃는 모습을 건우 선배에게 보여줬을 것이다. 귀는 시려도 얼굴은 뜨거워졌다.
‘아, 나는 정말 이 사람이 좋구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서인의 손을 잡아주던 따스하고 커다란 손의 촉감은 여전히 자신의 손등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손이 잡힌 듯한 느낌이 고스란히 들어서 서인은 살포시 다른 한 손으로 손등에 손을 포개어봤다.
그런 건우 선배는 유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동아리 사람들과 건우의 송별회를 하던 날이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환하게 달이 떠 있었다. 송별회를 갈까 말까 하는 마음의 갈등에 시간은 시작 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다.
송별회 자리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테이블 위엔 온갖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 있었고,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그를 붙잡고 얘기하던 다른 선배도 있었다.
서인이 앉아 있는 곳과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그의 자리. 말 한번 걸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 하는 모습에 답답해진 서인은 다시 일어서서 주위에 앉은 사람들에게 대충 인사를 했다.
“건우 선배, 저 먼저 가볼게요.”
“어, 그래....”
유학을 잘 다녀오라는 말조차도 하기 힘들었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그의 유학길에 잘 가라니. 하지만 입술을 깨물고 나오는 등 뒤로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아주길 바랐다.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 밝던 건지. 서인은 그날 밤에 남들이 보든 말든 펑펑 울면서 걸었다. 울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던 밤이었다. 너무 밝아서, 달이 너무 밝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눈이 시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되뇌며 눈물을 흘렸다.
..........
하아.... 서인은 생각을 떨치려고 고개를 몇 차례 흔들었다.
‘그래, 달이 밝아서.. 쓸데없이 달이 밝다. 옛날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씁쓸한 표정을 갈무리하며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가지 마.”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서인은 걸음을 멈췄다. 술이 덜 깨서 환청이라도 들리는 걸까? 잠시 구름이 끼어서 달빛이 가려지고 서인이 서 있는 곳은 어둡고 고요했다.
부스럭.
이게 무슨 소리지? 서인은 흠칫했다.
“누구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