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이 꽃피는 나무

by 달해슬

딸랑딸랑.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위에 매달린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서 직원이 인사를 하고, 은수는 익숙하게 안쪽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여기는 은수가 좋아하는 카페이다. 위치상 한적한 곳에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한가한 게 좋았다. 게다가 안쪽에는 개인실 같은 느낌의 공간이 여러 개 있어서 조용하게 분위기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비록 오늘은 분위기를 즐기려고 온 건 아니었지만.



자리에 앉아서 은수는 눈을 들어 벽에 걸린 액자를 바라보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이 자리에는 이 액자이지만, 다른 자리에는 고흐의 다른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중에 은수는 이 아몬드 꽃이 핀 나무 그림을 좋아했다. 볼 수록 온화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부드러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왔어요?”

그림을 한참 바라보고 있을 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서 있었다.

“어어, 내가 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했어요. 여기 찾기 어렵지 않았어요?”

“네비가 다 알려주는데요. 이 안쪽도 은수 씨가 미리 알려줘서 쉽게 찾았어요.”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그가 은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은수도 가볍게 미소를 지었지만 입가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으아, 내 얼굴 좀 부자연스러웠겠지. 지난번 유나와 서인과 함께 치맥을 하며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은 유나에게 계속 피하지 말고 그와 대면해야 한다고 했다. 여태까지는 그의 출장으로 인해 만남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출장에서 돌아왔으므로 그를 피할 명분도 없었다. 은수는 속으로 당당하게!를 외치며 마음을 다잡고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앞에서 주문 나온 커피를 마시는 그는 민선준. 은수와 같은 회사, 같은 부서이며 같은 직급인 대리이다. 그러나 그녀보다는 2살 어렸고 그녀가 보기에는 약간 능글맞은 면이 있었다. 물론 남들에게 선준은 잘 생기고 서글서글하며 일하는 능력 또한 좋다고 칭찬 일색이었지만, 이상하게 은수의 눈에만 삐딱하게 보인달까. 남들이 우쭈쭈 한다고 나까지 따라 할 필요는 없지, 라는 심리가 작용했던 것이다.



“이제 나 피하지 않기로 했어요?”

“헛참, 내가 언제 피했다고 그, 그래요?” 은수가 뜨끔한 바람에 마지막에 목소리도 삐끗했다.

“그날 이후로 출장이 생겨서 직접 피한 건 아니지만, 바빠서 전화도 못 받는다고 그러고 카톡도 아~주 늦게 확인하고 답하던데요.”

“그건 그쪽의 오. 해. 시. 고. 요.”

“그럼 이제 오해 없이 그날 일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그럽시다~” 흡.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맞받아치긴 했지만 은수는 다시 긴장했다. 선준이 어떻게 치고 들어올지 예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은 납니까?”

“왜 기억이 안 나... 겠어요. 약간.. 아주 약간, 조금씩은 확실치 않은 건 빼고...?”

“훗, 어디까지 기억나는데요?”

“음.. 그게...”





그날은 은수에게 운수 좋은 날이었다. 아침부터 일이 잘 풀린다 싶었는데, 뒤통수를 맞았던 날. 당연히 승진할 것이라 믿었는데 결과는 아니었다.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회식에 참석했고 괜찮다고 억지로 웃었던 게 화근이었나 보다. 생각보다 술을 더 달려버렸다. 내 앞에 이 녀석이 앉아 있었지. 생글생글 웃다가 뭔가 찌푸린 표정까지 하나하나 맘에 안 들어서 계속 확확 들이부었던 것 같다.



그리고 회식 자리가 끝나고 돌아갈 때만 해도 술에 완전히 취한 걸 들키지 않고 멀쩡한 인상으로 인사를 하고 사람들과 헤어졌다. 아니 헤어졌다고 생각했다. 술을 좀 깨려고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나타난 사람.



“괜찮아요?” 살짝 휘청거렸던 나를 붙잡고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

“아, 괘차나요, 괘차나~ 나 아무러치도 아나효.”

“후우, 집이 어디예요? 택시라도 잡아줄게요.”

“허어, 이런 고마우 테가 있나. 그러지 마고 우리 이왕 마신 킴메 따~악! 따악 한 자만 더 하까효?”


은수는 자신의 혀가 꼬부라진 채 발음하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술을 한 잔만 더 하자고 그와 실랑이를 벌였다.

“너님토 내가 진급 모테따코 불쌍해? 왜 이래, 나 혼자라도 마시테닷!”



선준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데리고 근처 포장마차로 갔다. 술을 조금만 마시겠다고 약속을 받았던 것 같은데, 술술 들어가는 게 술 아니던가. 은수는 무언 설움이 폭발했는지 아무 쓸데도 없는 얘기를 하며 웃다가 자신의 옛날 어렸을 때 얘기를 떠들어대면서 혼잣말에 가까운 원맨쇼를 하고 있었고, 선준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아주 가끔씩 맞장구를 쳐주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은수는 그 뒤에 정신을 조금 차렸을 땐,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 했고, 넘어질 뻔했고, 어지러웠고, 누가 붙잡아줬고, 아이, 책임진다고!를 외쳤었고.. 드문드문 빠진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우리가 왜.. 숙박업소에 가 있던 거예요?” ‘ㅁ’ 글자도 꺼내기 싫어 은수는 살짝 돌려 말했다.


“그때 포장마차에서 한참 혼자 얘기하다가, 갑자기 배 아프다고 한 것 기억 안 나요?”

“배가 아프다고 했다고요? 왜... 서, 설마…… 그, 그 배..?”


약간의 웃음기를 참는 듯한 얼굴로 선준은 대답했다.


“네, 배가 사르르 하다고, 화장실 가고 싶다고 그랬어요. 내가 포장마차 주인에게 물어보고 근처 화장실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은수 씨가 ‘화장실이 깨끗하지 않으면 싫다고.’ 몸부림을 쳐서 어쩔 수 없이 거기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데리고 간 거예요.”



오 마이 갓. 은수의 고질병. 술을 진탕 마시면 나오는 신호. 진짜 뱃속에서 사르르 해대는 그 느낌. 그리고 약간의 결벽증 때문에 은수는 외부 화장실이 더러운 걸 견딜 수가 없었다. 예전부터 술에 취해 있어도 화장실만은 깨끗한 곳으로 고수하는 바람에 대학생 때는 약간 이상한 애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 그, 그래서요.. 우리, 아니 나 설마.. 뭐 실수하진 않았지..요?”

“네, 뭐 배 아픈 걸로는 실수 없었어요.”


아, 다행이다. 그래도 난 여자이고. 상대방은 남자인데 거기까진 아니었군, 이라며 안도하던 그 순간.


“은수 씨는 시원하게 볼일 봤고 깨끗하게 뒤처리도 해줘서 괜찮았어요.”



왓!!!! 뭐라고!!!!! 으악!!! 은수는 그 순간 얼굴이 벌게지며 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이건 아니잖아! 왜 장르가 갑자기 스릴러로 바뀌어!! 이건 완전 공포 그 자체라고!!! 은수는 고개를 숙이며 그의 눈을 피해버렸다.



잠시의 침묵 뒤에 은수가 눈만 살짝 들어 올리며 선준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다 가운으로 갈아입고 있었어요? 깨, 깨끗하게 ....처리도 했다면서요.”

“그게.. 은수 씨가 화장실에서 한참 안 나왔어요. 그러다가 물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기다렸다가 혹시나 해서 똑똑 노크를 했었죠. 대답이 없어서 들어가 보니 샤워기 물줄기를 틀고 그 아래에서 잠들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데리고 나와서 젖은 옷을 갈아입히느라..”

“그래요.... 그럼 선준 씨는 왜..?”


“음... 그 뒤로는 은수 씨가 살짝 실수를 했어요.”

“네? 내가 뭘... 요?”

“가운으로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혔더니 계속 잘 자더라고요. 잠든 사람만 두고 나가긴 그래서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나도 어느새 잠깐 졸았었나 봐요. 은수 씨가 자다가 목이 마르다면서 움직였는데 헛디뎠는지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어요. 마침 나도 잠결에 그걸 듣고 운 좋게 잡았고요. 물 한잔 마시고 다시 잠들 줄 알았는데, 은수 씨가 속이 안 좋다고 하더니 그만 바닥에.... 그러면서 내 옷도 좀 그렇게 되었죠.”



아아.... 나는 물컵에다 코 박고 죽어야겠다.. 살아서 뭣하리오. 이런 치욕스러운 삶이라니.. 그것도 이 민선준 앞에서!! 은수는 눈 앞에 있는 유리컵을 들어서 코를 박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선준은 더욱 그녀를 비웃겠지. 지금도 말하면서 뻔뻔한 저 표정을 봐라. 은수는 이런 민망한 이야기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얘기하는 그가 너무나 미웠고, 동시에 그에게 민망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그 추잡한 일의 뒤처리를 겪어야 했으니 말이다. 내 가족이 그래도 구역질이 났을 텐데. 은수가 오전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에게 제대로 물어도 안 보고 쏘아붙이듯이 제 할 말만 하고 나가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아, 내가 석고대죄를 해도 이 잘못을 어떻게 수습할 수가 없겠어요.. 정말 미안해요... “

새빨간 얼굴로 사과하는 은수의 모습을 보며 선준은 괜찮다며 웃었다.


“괜찮아요. 책임지기로 했는데 그런 걸로 뭘요.”



생글거리는 그의 얼굴 보며 은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도대체 뭘 책임진다고? 뭔가 큰일이 벌어진 줄 알고 바짝 쫄았었구만.. 물론 큰일은 큰일이지만. 하아, 이게 무슨 창피야.



은수는 살짝 정색을 하고 선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근데 왜 내가 선준 씨를 책임져야 해요? 솔직히 이 이야기 속에서 내가 책임질 만한 일을 한 게 없는데요.”

“정말 없다고 생각해요?”



묘한 표정을 짓는 선준을 바라보며 은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뭐야, 뭐가 더 있는 거야..? 에이 설마, 그 더러운 일을 다 겪었는데 뭔 일이 벌어졌다고? 말도 안 돼...!!



“내 옷도 빨아서 널어두고 지쳐서 소파에 앉아 있는데, 은수 씨가 나한테 다가왔던 건 모른 척하는 겁니까?”

“헐... 말도 안 돼요. 그렇게...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요..?”


“내가 더 이상 다가오면 안 된다고 했어요. 난 사귀는 사이 아니면 안 된다고. 이런 행동에는 책임 못 진다고요. 그러니까 은수 씨가 나한테 ‘아이, 책임진다고! 내가 책임지면 되잖아.’ 이러면서 나한테... ”

“그, 그만이요!!! 으앗, 그만 말해도 돼요. 그날의 일 제대로 다 알아들었어요!!”



두 손을 테이블에 놔둔 채 손등에 이마를 대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은수는 꼭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싶은 사람 같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선준이 말했다.


“책임져요. 나. 그날 그때 꽤 충격적이긴 했는데, 당신이 그래도 예뻐 보였거든. 나 아무래도 이상해졌어요. 그러니 당신이 책임져야지.”


그리고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한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는 선준이었다.


“이제부터 나를 남자로서 만나봐요. 사귑시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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