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마.. 내가 미안해..”
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서인은 흠칫했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면서 서서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서 있는 곳 근처 놀이터에 연인인 듯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 커플이 다투고 있었나 보네. 캄캄한데 목소리만 들려오니 깜짝이야.’
서인은 발을 떼지 못하고 그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어둠에 가려져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하다..”
남자가 여자에게 꽤 잘못한 것 같았다. 그가 계속 매달려도 여자의 반응은 냉랭했다.
“내가 아까 아무리 꼭지가 돌았어도 그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미쳤었나 보다. 내가 미친놈이야.. 진짜 잘못했어..”
“아무리 화가 났어도 할 말 못 할 말이 있지, 그 말이 나한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알면서 그래?”
여자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상처... 상처되는 말이라....’
서인은 여자의 말을 듣고 떠오르는 기억에 가슴이 죄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억을 털어버리듯이 머리를 흔들고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올라갔다.
서인이 술을 사 온 사이에 유나는 전화 통화를 끝냈는지 다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써인~ 어서 와. 그대를 기다렸소!” 유나가 불렀다.
“내가 냉장고 뒤져서 과일이랑 오징어랑 찾아냈어. 2차는 과일 안주에 마른안주야.” 은수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셋은 다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유나가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에휴. 이 남자는 내가 헤어지자고 먼저 말한 게 분했나 봐. 아까 나한테 따지듯이 말하는데 이거 원.. 말 꺼낼 때까지 내가 눈치껏 기다리지 않은 게 죄다 죄. 내 연애는 왜 다 이러냐. 전생에 무슨 죄를 졌다고..”
“근데 진짜 이번에는 마음이 있긴 했어? 간이고 쓸개고 빼준다고 해도 막상 네 연애 얘기 들어보면 그게 아닌 것 같아.” 은수가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유나를 쳐다봤다.
“맞아. 나도 그거 느꼈어. 유나 너는 어쩐지 벽을 세우고 있는 것 같아. 겉으로는 불태운다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뒤로 물러서려는 느낌이랄까? 항상 연애하면 이런 패턴이잖아.” 서인도 맞장구를 쳤다.
“그게 무슨 내 탓이야? 이게 다 그 녀석의 저주인 거야..!” 유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녀석이 나를 차면서 내 연애 흑역사가 시작된 거라고. 아우.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 봐라! 멱살을 잡고 흔들어 주겠어!”
씩씩거리는 유나를 두고 은수와 서인은 서로 눈을 마주친 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인정하지 않는 건 또 시작이구만.
연애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그 녀석의 저주. 이것은 유나가 고등학교 3 학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유나는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가 자신을 좋아한다며 고백하자 기뻐하며 사귀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성을 좋아하게 된 것이라 서툰 풋사랑의 만남이었다. 게다가 그 애가 너무 좋아서인지 오히려 표현을 잘하지 못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겉으로는 틱틱거리거나 실수라도 할까 봐 말을 거의 안 했던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은 그것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결국 100일도 안 되어서 이별을 통보했다.
‘네가 날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헤어지자.’
유나는 당시 첫사랑에게 차인 충격이 트라우마로 남았는데, 이는 대학에 가서 다시 누군가를 사귀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본인은 열정적으로 빠져들어도 (빠져들었다고 생각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열정이 올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깊은 관계로 나가기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좋아하는 상대이지만 어느 순간 뭔가에 막히는 듯한 느낌으로 감정이 식어버렸다. 그때마다 유나는 처음 그 풋연애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러다 또 갑자기 자기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면 어쩌지?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내 마음을 보여줘야 하는 거지?’ 이렇게 이상한 고민에 빠져들면서 감정이 바닥을 치고 어느샌가 에너지를 다 소진하듯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녀가 식어버린 마음을 두고 이별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걔가 나쁜 놈이었어. 왜 내 마음을 몰라줬냐고. 으~ 이 저주를 어떻게 풀어!!”
유나를 머리를 헝클면서 외쳐댔다. 항상 같은 레퍼토리에 은수와 서인은 코웃음을 치고 맥주를 들이켰다.
지이잉.
진동소리에 은수가 핸드폰을 얼른 쳐다봤다. 그러다 움찔하며 다시 얼른 핸드폰을 뒤집어 내렸다.
“은수씨? 너 뭐 있냐? 이 언니가 저주의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아까부터 집중을 못하시네?”
“어디 연락 올 데 있어? 일 때문에 그래?” 서인도 한마디 거들었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하핫...”
또다시 진동이 울리고 은수가 둘을 의식했는지 핸드폰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뭔지 한 번 봅시다?” 하면서 옆에 앉은 유나가 얼른 은수의 핸드폰을 낚아채었다.
그리고 핸드폰 앞 화면에 뜬 노란 톡 미리 보기 창에는 남자 이름 같은 대화명과 <저 책임지세요(하트) >가 보였다.
“대박! 대박!! 뭘 책임지라는 거야?”
“안돼!” 하며 은수가 얼른 빼앗아 왔지만 이미 글자들은 유나의 눈으로 들어가 입을 통해 나왔다.
“나는 이미 하트를 보았단 말이다! 당장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얼른 말하거라~” 유나가 닦달하자 은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실은.. 아휴.. 사고를 쳤어.... “
“헐, 대박. 누구랑? 썸 타는 사람 있었어? 그동안 우리한테 얘기한 적 없잖아?”
은수는 앞에 있는 맥주캔을 꽉 쥐어 올리며 말했다.
“하아.. 웬수다, 웬수. 바로 이 술이 문제야. 너 말이야 너. 너 때문이라고!”
손에 든 맥주캔을 노려보며 말을 한 은수는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고는 쾅 내려놓았다.
“후우.. 얼마 전에 회식이 있었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