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연한 만남 (1)

by 달해슬


‘이제부터 나를 남자로서 만나봐요. 사귑시다, 우리.’



으아~~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며칠 째 은수는 그날의 일만 떠올리면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했다. 그날 그녀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

“아니, 진짜 이상해진 거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그런 추함을 보고도 그 말이 나와요? 선준 씨, 제정신 맞아요?”

“은수 씨 때문에 이상해진 건 맞는데, 정신 놓지도 않았고 상식적으로도 잘 살고 있었어요. 그러니 출장도 갔다 왔겠죠. 안 그래요?”

싱긋 웃는 그를 보며 은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손은 왜 계속 잡고 있는 거니.

“이, 이건 좀 놔주죠..”


은수는 억지로 손을 잡아 빼고는 무릎에 가지런히 얹었다. 아쉬워하는 그의 표정은 모른 척하며 말을 했다.

“좀 많이.. 당황스럽네요. 풀 스토리를 들었지만.. 나도 좀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지금 당장 대답하긴 어려워요.”

“그래요. 그럼, 생각할 시간 드릴게요. 이틀? 아님 내일?”

“헉.. 제발..... 일주일만!! 일주일 만이라도요!”

탐탁지 않아하는 선준에게 비굴비굴 사정사정 눈빛을 발사하며 겨우 일주일 시간을 벌었다.

.........





“에휴, 차은수. 네가 다시 술을 마셔봐라. 이것아, 내가 스스로 주리를 틀어버릴 거야!”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원망해봤자 누워서 침 뱉기였다.


띠링띠링. 카톡이 왔다. 선준이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 어때요? 저번에 만났던 카페 근처에 사진 전시회 있는데 거기 같이 갈래요?]

[아직 일주일 안됐는데요..?]

[그전에 나 한 번은 더 봐야죠. 내가 어떤 남자인지 알아야 대답을 결정하기가 수월하지 않겠어요?]

[알았어요. 같이 가요.]

그래, 남자로서 한 번은 봐봐야 사귀든지 말든지 하지 않겠어? 이건 데이트 아니고 탐색전이야. 탐색전! 하트 따위에 두근거리지 말자고!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는 은수였다.







유나는 오랜만에 평일에 쉬게 되자, 며칠 전부터 눈여겨봐 뒀던 가전제품 대형 매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지만 오픈 행사로 방문만 해도 사은품을 푸짐하게 준다는 홍보 문구에 혹했던 것이다. 그 문구를 다 믿는 건 아니라서 혹여 필요하다면 작은 청소기 하나 정도는 살 의향도 있었다.

매장으로 들어가 가전제품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오픈 행사 기간은 넉넉했고,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유나도 여유 있게 이것저것 보면서 요새 신기능을 탑재한 제품들이 많이 나왔구나 하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매장은 상당히 넓고 컸다.

위층으로 올라가니 생활 가전제품들이 나왔다. 청소기나 있는지 살펴볼까 하며 움직일 때 냉장고 쪽에서 서 있는 한 커플을 보게 되었다. 뒷모습만 보였지만 가까이 붙어 있는 모습이 신혼부부이거나 예비부부인 것 같았다. 특히나 여자 쪽이 많이 신났는지 남자의 한 팔을 붙잡고 뭐라고 소곤거리는 것 같았다.


훗, 좋을 때다.


그들을 힐끗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그들의 동선이 세탁기 앞에서 겹쳤다. 유나가 집에 있는 것과 다르게 생긴 세탁기를 살펴보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그 커플도 세탁기 쪽으로 걸어온 것이다. 근처에 있다 보니 듣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커플의 대화가 귀에 들렸다.

“정말 내가 이것저것 맘대로 골라도 돼?”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진짜! 역시 오빠가 최고야! 고마워, 사랑해~”

여자가 한없이 좋은지 하이톤으로 웃으며 남자의 팔에 매달렸다.


저렇게 좋은가, 어휴 닭살 커플이네.


유나는 여자에 비해 남자가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그저 성격일 거라 맘대로 추측했다. 여자가 즐거워서 팔짝팔짝 뛰는 걸 보면서, 도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냐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봤다.

여자의 웃는 모습도 예뻤고, 얼굴도 예뻤고 심지어 몸매도 예뻤다.


오, 신이시여.. 세상 다 가졌네. 저런 여자는 누구를 만나는 걸까.


유나의 마음속 오지랖은 점점 담쟁이 덩굴처럼 뻗쳐 나가서 남자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연예인 닮은 얼굴인가, 뭐지? 이 어디선가 본 느낌은..? 최근에 내가 무슨 드라마를 봤더라?

레이저를 쏘는 유나의 눈빛을 느꼈는지 순간 남자도 유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고 한동안 그와 유나는 서로를 보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입을 여는 순간, 유나는 얼른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을 틀어 한 걸음 두 걸음 걸으며 이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유나의 한 손이 붙잡히며 잡아당겨지는 걸 느끼는 순간 몸이 다시 틀어졌다. 그와 마주 보게 되면서 유나는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걸 보았다.

“김유나!”

“오빠!!”


그리고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깜짝 놀라며 남자의 팔을 잡았다. 여자가 다시 팔을 흔들자 그제야 남자는 잡았던 유나의 손을 놓아줬다.

“김유나..”


굳은 표정을 짓는 남자.


“.. 오랜만이네. 신현욱.”


유나 역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신혼부부인지 예비부부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나간 옛사람과 이렇게 조우하게 되다니. 유나의 연애 흑역사의 시작, 저주의 원흉, 신현욱. 바로 그였다. 10년도 더 지났지만 늘 저주를 읊어대서 그런지 이름이 절대 잊히지 않던 그 녀석. 그러나 그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걸 되새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빠...”


남자 곁에서 작게 속삭이는 여자의 목소리에 유나는 정신이 들었다.


“마, 만나서 반가웠어. 그럼 일 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유나는 후다닥 그 자리를 피해 아래층으로 내려와 매장 밖으로 나갔다.



살면서 언젠가 만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녀의 상상 속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만남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곁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원천 차단했었으니까.


유나의 상상 속에선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서 있고, 우연히 그와 마주치는 것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유나가 터벅터벅 걸어갈 때 뒤에서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김유나.”


뒤를 돌자 현욱이 서 있었다.


“어.. 왜..?”


멍하게 되물었다.


“여기 내 명함. 연락처야. 핸드폰으로 전화 걸어봐.”

“어.. 어..?”

“얼른 해봐.”

“아, 알았어...”


기계적으로 손에 든 핸드폰으로 명함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이이잉. 진동으로 울리는 핸드폰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 번호구나. 네 번호.”

“......”

“내가 연락할게. 내 명함만 주면 너는 연락 안 할 것 같아서.”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현욱은 조심히 가라고 하고선 다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명함을 쥐고 유나는 흐릿한 눈빛으로 방향도 모른 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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