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연한 만남 (2)

by 달해슬

주말이었다. 은수는 아침부터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차분한 단장을 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집으로 데리러 온다는 그를 말려서 각자 이동해서 만나자고 했는데, 어쩐지 걸음마다 떨렸다.


익숙한 곳인 카페 앞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회사에서랑 다른 평범한 캐주얼 차림인데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뭐야, 심장아, 나대지 마~ 나 이러다 쿵쾅거리는 소리 다 들리겠어~~


전시회장으로 걸어가며 선준은 자연스레 은수의 손을 잡았다. 은수는 당황해서 저번처럼 빼려고 했으나 꽉 잡힌 손은 빠지지 않았다. 낭패 어린 표정의 그녀를 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그 미소에 순간 아찔해져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여기는 제 친구의 고등학교 선배가 이번에 개인전 연 거예요. 친구랑 같은 동아리였는데 그다지 친한 건 아니었나 봐요. 나도 개인적으로 모르고요. 그래도 유럽에서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라 사진들은 볼만 할 거예요. 실은 나도 얘기 듣고선 찾아보고 왔어요.”


아후, 지인이라는 줄 알고 깜놀할 뻔했네. 모르는 사람이라니까 안심이다.


은수는 선준의 말에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회장에 입장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구에 있는 사진작가의 얼굴을 본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왜 그래요?”


선준이 은수의 긴장을 눈치챘는지 물어봤다.


“아, 아니에요. 이런 전시회는 처음이라..”


은수와 선준은 안에 들어가 천천히 움직이며 사진들을 감상했다. 사진 같은 건 볼 줄 모르는 은수의 눈에도 멋진 사진들이었다. 그때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사진작가가 그들에게도 다가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은수와 사진작가가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을 때 둘의 반응이 미묘했다. 선준은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인사만 하고 다른 이들에게로 가서 또다시 인사를 하던 사진작가는 조금 뒤에 다시 은수에게로 다가왔다.


“혹시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을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사진작가의 요청에 은수는 선준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하는 은수와 사진작가를 선준은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은수는 사진작가의 명함을 받았고, 금방 다시 선준에게로 왔다.


“그만 갈까요?”


선준의 말에 은수도 그러자고 했다.




선준의 차로 걸어가며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선준은 이 침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속으로는 질투에 휩싸였다.

‘혹시.. 과거의 인연인가? 설마 아직도 마음이 남아있는 걸까?’


그녀의 마음을 갖고 싶은 한 남자는 강렬하게 치솟는 질투에 눈이 뒤집히고 있었지만, 정작 그 여자는 그의 마음도 모른 체 멍하니 걷고 있었다.


“은수 씨, 아까 사진작가랑 무슨 얘기 했어요? 혹시 말해줄 수 있어요?”


“네? 아, 아니요. 별 거 아니었어요.”


은수는 주저하며 말했다.


선준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은수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자 그제야 아차 싶었다.


“둘이 사귀던 사이었어요?”


“에엥? 오, 오해하지 말아요.”


은수가 손사래 쳤다.


“제 친구랑 아는 사이예요. 아니, 사이었어요. 친한 친구랑 관련된 거라 내가 더는 어떻게 말을 못 하겠네요.”


선준은 은수의 말을 듣고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럼 둘이 무슨 사이 아니라는 거죠?”


“네에? 그럼요~ 그 사람이랑 저랑 무슨 사이는요. 요새 내 머릿속에 당신으로 가득 차서 누가 들어올 자리도 없거든요! 헙.”


입을 막았지만 이미 뱉어나간 말이었다. 은수는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반대로 선준의 얼굴은 화색이 돌았다.

“그게 내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해도 됩니까?”

은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아직 일주일 안됐어요. 생각, 생각 중이라고요.”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선준은 웃었다. 그리고 은수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요. 생각 많이 해요. 꼭 나만 생각하기예요. 내 머릿속에도 온통 은수씨뿐이니까.”









“불금이네. 오늘도 치맥?”


유나의 말에 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은수를 불렀다. 맛있게 치느님을 영접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유나는 조금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김유~ 왜 그래? 잘 먹던 치킨을 열심히 뜯지를 않아. 뭔 일 있어?”


은수가 유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하아.. 있잖아. 나 얼마 전에 내 연애 흑역사의 저주를 만났어.”


“진짜? 세상 좁다~ 살면서 만나지기는 하네. 근데 어째 뭔가 별로인 것 같다.”


“어쩐지.. 너 요새 집에서 보면 뭔가 이상했어.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서인도 걱정의 말을 보탰다.


“참 세상 좁지. 설마 그런 식으로 만나질 줄이야.. 여하튼 걔가 나한테 연락을 했거든. 그래서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참 뭐랄까... 그땐 우리가 정말 어렸었구나 싶더라고. 이렇게 엇갈릴 줄 알았더라면... 타이밍이 참...”


유나는 맥주를 한 입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난 내가 억울하게 차인 줄 알았거든. 문자로 헤어지자고 통보하다니, 진짜 중2병도 아니고. 그때 당시에 나 엄청 울었었어. 매일매일 진짜 난리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유나는 맥주를 한 입 더 마신 뒤에 입을 뗐다.


“근데 걔가 그러더라고. 그땐 자기도 누굴 사귀는 게 처음이라 내가 정말로 자기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너무 답답했대. 그래서 친구한테 물어봤었는데 그렇게 문자를 보내면 바로 연락 와서 매달릴 거라고, 그러면 진짜 너를 좋아하는 거고. 아니라면 너한테 마음이 없는 거다, 이랬다는 거야.”

“아이고, 남자애들은 맨 야동만 보니까 연애는 이상하게 배워와.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은수가 닭가슴살을 포크로 쿡 찍어 먹으며 거들었다.

“웃긴 건 뭐였는지 알아? 실은 그때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인터넷 막 뒤졌었거든. 그때 봤는데 짧게 안녕. 하고 답장 보내고 잠수 타고 있으면 남자와 와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하면서 매달린다는 거야. 내가 그렇게 문자 보내고 연락 끊고 매일매일 울고불고 혼자 난리 치면서 기다렸는데 결국 연락이 안 왔던 거지. 그래서 걔가 나를 이젠 안 좋아하는구나 했고.”

“쯧쯧, 인터넷이 잘못했네. 다들 연애를 글로 배워서 이렇게 된 거였어.”


옆에 앉아 있던 서인이 유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하아.. 서로 오해를 했었는데..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까 왠지 허탈하더라고.”

“왜? 이제 오해 풀렸으면 뭔가 잘 돼야 하는 거 아냐? 로맨스 소설 보면 이렇게 첫사랑 만나서 쭉쭉 풀리던데.”


최근에 로맨스 소설에 입문한 은수가 눈을 반짝였다.

“아니지, 그건 소설일 뿐이지. 너야 이제 막 입문했으니까 다 핑크빛처럼 보이겠지만, 몇 년 읽어봐라. 소설이랑 현실이랑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


은수에게 로맨스 소설을 권해줬던 서인이 아직 멀었다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유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현욱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




“너도 잘 지냈지? 10년도 넘게 시간이 지났네... 후훗. 음.. 전에 봤던 그 여자분 예쁘던데.... 결혼... 했어? 아님 결혼할 예정이야..?”

유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그는 도대체 왜 자신에게 연락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주가 너를 이렇게 불러온 걸까? 저주는 저주를 한 사람에게로 다시 돌아온다던데, 나는 이렇게라도 너를 잊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 옛날 나를 한참이나 울렸던 네가 돌아오길 바랐던 내 마음이 이제야 너에게로 닿은 걸까...


“그 여자? 아아... 곧 결혼하지.”


현욱의 말에 유나의 마음에서 지난 며칠 동안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실낱같은 기대가 무너졌다.

“그렇구나.. 결혼.. 축하해.”


유나 역시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



“현욱이 걔 곧 결혼해. 처음 마주쳤을 때 여자랑 있어서, 내가 통화할 때 물어봤었거든. 그냥....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둬야 하는 건데... 왜 이리 가슴 한편이 허전한지 모르겠다..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또 달라졌을까? 그냥... 그냥.... 오늘까지만... 이렇게 말하고 털어버릴라고. 결혼 앞둔 남자한테 미련 따윈 없지. 다 털어버리자! 마시자 마셔~~”

유나가 맥주캔을 들고 짠 하려는 신호를 보내자, 은수와 서인도 함께 했다.


“그래, 열심히 뜯어먹고, 마시고, 그렇게 날려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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