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빠는 딸바보일까요?

by 달해슬

현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웹소설에서는 주인공 두 사람이 만나서 티격태격하거나 썸을 타다가 서로가 진짜 사랑임을 깨닫고 행복하게 영원을 약속하며 끝을 맺는 게 본편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주인공들처럼 같이 행복해지는 독자들을 위해 작가님들은 서비스를 주세요. 그게 바로 외전이지요.



현대 로맨스에서 외전에는 결혼하는 과정에 결혼식 하는 장면을 다루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임출육에 대하여 나옵니다. ‘임신, 출산, 육아’ 3종 세트를 줄여서 ‘임출육’이라고 해요. 행복한 두 주인공에게 경사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그들을 똑 닮은 2세가 태어나서 알콩달콩 사이좋게 사는 모습을 보면 흐뭇한 엄마 미소가 절로 나오게 됩니다.



물론 외전까지도 임출육에 대해 다루지 않는 작가님들도 있어요. 한 명의 독자로서 제 취향도 안 다루길 바라는 쪽이고요. 하지만 그 이야기가 나온다고 안 읽지는 않아요. 외전 읽기는 작가님과 독자 사이의 의리이면서 주인공들과의 의리이기도 하거든요.



이러한 임신과 출산, 육아를 다루는 외전을 어느 정도 읽다 보면, 눈에 잘 들어오는 익숙한 문장들이 있어요.



상황을 보면 남주인공은 아빠, 여주인공은 엄마가 되고 아들이나 딸을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한 명이거나 두 명으로 등장할 때도 있고요. 나이는 대략 5살에서 7살 사이입니다. 말도 할 줄 알고 깜찍하고 이쁠 때에요. 어리지만 또래보다 영특하고 생각이 깊은 걸 보여줄 수 있는 나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여자아이라면 아빠는 꼭 ‘딸바보’ 소리를 듣습니다. 작가님은 거의 대부분 그 단어를 사용해요.


기본적으로 로맨스 웹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만 사랑합니다. 하늘 아래 그녀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요. 자신은 부모보다 더 아내를 사랑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부모의 인성이 아주 나빠서 절연 상태이거나 친부모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닮은 예쁜 딸을 키우고 있으니, 아내 자랑과 딸 자랑에 푹 빠져 아주 멋지고 카리스마 있고 완벽한 그 남자는 이제 주변 인물들에게 팔불출로 보이게 되고 말아요.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제 자식에게 푹 빠져 있으니 ‘딸바보’가 뭐가 어때서 그러냐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의아해하시겠지요.



그리고 아빠가 된 남주가 아들만 키우고 있을 때에도 아빠는 아주 멋집니다. 아들 사랑이 대단하지요. 자신의 분신이고 후계자이니까요. 이때에도 보통은 ‘아들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요. 안 쓰기도 하는데, ‘딸바보’가 있으니 균형에 맞게 쓰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제 ‘딸바보’만큼 많이 보는 문장을 떠올려 보세요. 뭐가 있을까요? 로맨스 웹소설 많이 읽은 독자들은 눈치챌 이 말은 바로, ‘아빠는 아들을 질투한다.’입니다.



남주인공이 아들을 키울 경우, 그 귀여운 아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당연히 엄마예요. 여주인공은 처음부터 그들의 세상에서 한 미모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아들의 눈에도 얼마나 아름다운 어머니겠어요.


그런 아들은 아빠도 사랑하지만, 가끔은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어서 아빠랑 신경전을 벌입니다. 왜냐하면 아빠도 엄마를 열렬히 사랑해서, 엄마랑 데이트하거나 밤에 한 침대에서 자는 걸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거든요.


이런 아빠와 아들의 신경전에 엄마는 웃으면서 ‘애 하고 뭐 하는 거예요?” 하며 타박해도 우리의 남자 주인공은 아주 꿋꿋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은 아들이어도 절대 뺏길 수 없다고 하지요.



그래서 작가님들이 ‘아빠는 아들을 질투한다’고 써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소설이니까, 그만큼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절절하게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또 뭐라 그러냐고 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는 본 적 있으신가요? ‘아빠는 딸을 질투한다.’ 이런 상황이나 장면, 이런 문장을 보거나 읽은 적 있으세요? 기억나는 소설 있나요?


전 로맨스 소설 독자 경력 25년 차인데, 이 경우를 본 적이 없어요. 물론 제가 세상에 나온 모든 로맨스 소설을 전부 다 읽지는 않았기 때문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과 로맨스 웹소설 독자분들에게 그런 문장을 본 적 있는지 묻고 싶어요.



분명 예쁜 딸을 키우면 그 딸의 눈에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에요. 그리고 당연히 딸도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어질 테고요. 그런데 딸을 키우는 과정 속에서는 아들을 키울 때랑 비슷한 상황이나 장면이 나오지 않아요.



딸은 엄마를 독차지하려고 하는 장면도 별로 없고요. 있다고 해도 아빠는 무한한 이해심이 발휘됩니다. 난감하기는 하지만 너도 엄마를 많이 사랑하니까, 하면서 받아들여요. 그 어느 작가도 아빠가 딸을 질투한다는 걸 표현한 적이 없어요.





​어휘력은 사고력과 관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라고 했지요.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에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떠한 의도를 담고 있는지도 나타나 있습니다.



작가님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딸을 가진 남주인공은 딸은 마냥 예쁘게만 바라보면서, 아들은 경쟁 상대로 의식하지요. 아빠에게 딸은 아빠와 아들의 관계와 달리 경쟁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경쟁 상대’라고 하니 혹시 ‘오디이푸스 콤플렉스’를 떠올리시나요?



저는 어휘력이 사고력과 관계가 있다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려고 합니다. 제가 언급했던 단어 중에 ‘팔불출’이 있어요. ‘팔불출’은 사전 뜻풀이에 몹시 모자라거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이 말은 오래전에 인간의 계훈에서 몇 가지를 자랑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고 하면서 나왔어요. 그중에 아내 자랑과 딸 자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남성’이 주체가 되어요. 남자가 남자다워야지, 아내나 딸을 자랑하고 다니면 모자라게 보인다고 쯧쯧, 하는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의 노한 음성이 자동지원되는 것 같아요.


‘딸바보’도 딸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부드럽게 ‘바보’라고 붙였지만 은연중에 원래 바보같이 굴지 않는데 딸을 너무 예뻐하니 바보가 되는군, 이라는 다른 남성들의 시선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한 어휘력을 사용하고 그것을 계속 학습화하면서 내재화되면 그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됩니다. 사고력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두고 그 세상에서 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에요.



아무리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어휘들을 그대로 습관화해서 사용하면, 남성에게는 여성이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성은 예뻐하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은연중에 인식하게 됩니다.




적어도 작가님들은 그러한 사소한 어휘들이 독자들에게, 미래의 작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10년 뒤에도 여전히 웹소설 외전에서 같은 상황에서 같은 말을 본다면 씁쓸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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