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이 건우의 전화를 받고 그를 만나게 된 건 며칠이 더 지나서였다. 카페에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는 건우를 보며 서인은 긴장한 모습이 느껴지지 않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거의 10년 만의 만남이었다. 눈앞의 그는 기억 속의 그의 모습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멋있었다.
인사와 가벼운 안부, 시답잖은 날씨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하며 시간만 어색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개인 사진전 열었다고 들었어요. 사진은 못 봤지만 축하해요. 앞으로도 잘 되길 바랄게요. 진심이에요. 이제 더는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날게요.”
서인이 일어서려고 할 때 건우가 입을 열었다.
“나.. 알고 있었어. 그때 왜 서인이 네가 유학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는지.”
서인의 눈동자가 커지며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나중이지만... 어머니에게 들었어. 후우.. 유학 시절에 어머니가 편찮으셨어. 많이 쇠약해지셨지. 어느 날 한국으로 한 번은 들어와 달라고 하시는 게 심상치 않더라... 그래서 어머니 곁으로 갔었어. 그때, 네 얘기를 하시더라..”
“뭐라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내가 너를 많이 좋아하는 걸 알고, 그 아가씨에게 모질게 굴었다고. 상처 입힌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죄받은 것 같다고 그러셨었지. 이야기를 전부 해주셨어. 그때 너를 만났던 걸.”
“......”
“어머니는... 본인이 생각하는 게 맞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 사는 게 별 거 없더라고 하셨었어.
‘내가 건우 너의 행복을 망쳐버렸구나. 너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생을 잘못 살았어.. 미안하다 건우야.. 앞으로는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렴. 아버지도 신경 쓰지 말고... 언젠가 네게 다시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구나.. 혹시라도 그 아가씨를 만나게 되면.. 정말 미안했다고 전해주렴..’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이었지.. 나중에 병환이 악화되어서 정신을 잃으시고는 결국 돌아가셨어..”
“아...”
“미안해.. 어머니를 만났던 것도 몰랐고, 네게 상처 준 줄도 몰랐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서 미안했다..”
서인은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선배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구나.. 그가 돌아와도 자신은 그 옆자리에 없을 거라고 말했던 분.. 살아계셨다면 지금의 자신은 인정해줬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다. 게다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던 고인이 아닌가.
서인은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요... 그때.. 어머님이 아니더라도.. 저는 유학을 안 갔을 거예요. 선배한테 말하지 않았는데 당시에 아버지 병이 재발하셨거든요. 어머니는 일하시고 저는 간병하고.. 유학 간다고 욕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내가 말했던 그 모진 말들이... 선배는 돌아가신 어머님이 다 시킨 거라고 생각하고 죄책감이 들었을지도 몰라요..”
“……”
“그런데 돌아가신 분 핑계를 대고 싶지만... 그때 했던 모진 말들에서 반은 제 진심이었어요.. 유학을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선배도 떠나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냥 여기 머물러주길 바랬어요.. 이것까진 선배도 몰랐을 거예요..”
건우도 서인도 한동안 서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선배, 저는... 우리는 그때 제대로 헤어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여러 상황에 휘둘렸었죠.. 그래요.. 그래서 더 아쉽고 애틋했을지도 몰라요.. 근데 그냥 그걸로 끝내요.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 이렇게 서로 이야기했으니까.. 이제 여기서 과거는 과거로 끝내요.”
서인은 긴 침묵을 뒤로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 순간 건우가 다가와서 뒤에서 서인을 끌어안았다.
“그땐.. 우리가 어려서.. 힘이 없었어. 상대방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지.. 그런데 서인아, 이제는 아니야. 이젠 나, 다시는 네가 상처 받지 않도록 지켜줄게. 단 한 번도 너를 잊어본 적 없어. 너는 끝이라고 해도 나는 너를 절대 놓지 않을 거야.”
서인을 끌어안고 있던 건우가 팔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나 서인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어 나갔다.
서인이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비 소식이라 서인에게는 우산이 없었다. 내리는 비를 잠시 바라보던 서인은 지나가던 택시를 붙잡아 탔다. 뒷좌석에서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앉아 비가 내리는 바깥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휴, 갑자기 소나기가 세차게도 내리네요. 손님, 라디오 좀 틀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택시기사가 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밝은 목소리의 디제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팝송 제목이 소개되며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How do I get through one night without you
제가 어떻게 당신 없이 밤을 보낼 수 있을까요
If I had to live without you
당신 없이 살아야 한다면
What kind of life would that be
어떤 삶이 될까요
Oh I, I need you in my arms Need you to hold
당신을 제 품에 꼬옥 안고 싶어요
You're my world, my heart, my soul
당신은 나의 세상, 나의 마음, 나의 영혼이죠
If you ever leave
당신이 영영 떠나버리면
Baby, you would take away everything good in my life
내 삶의 중요한 모든 걸 앗아가는 거예요
And tell me now How do I live without you
지금 제게 말해줘요 당신 없이 어떻게 살죠
I want to know How do I breath without you
알고 싶어요 당신 없이 어떻게 숨 쉴 수가 있어요
If you ever go How do I ever, ever survive
당신이 떠나버리면 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How do I How do I Oh, how do I live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살아가나요 ]
창문에 기대고 있던 서인이 흘러나오는 팝송을 듣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건우 선배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제대로 헤어지자고 한 것은 본인이었지만, 막상 이 노래를 듣고 있으니 그 없이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진동이 울리며 문자가 왔다. 힘겹게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건우였다.
<네가 없으면 난 더 이상 살 의미가 없어. 너만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야. 절대 포기 안 해. 사랑해.>
[And tell me now How do I live without you
지금 제게 말해줘요 당신 없이 어떻게 살죠
I want to know How do I breath without you
알고 싶어요 당신 없이 어떻게 숨 쉴 수가 있어요
If you ever go How do I ever, ever survive
당신이 떠나버리면 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How do I How do I Oh, how do I live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살아가나요
How do I live without you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가나요
How do I live without you baby
당신 없이 어떻게 살아가나요
How do I live
어떻게 살아가나요.. ]
서인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방울이 흐르기 시작했고 끝내는 흐느꼈다. 서인은 입술을 손으로 막고 울음을 참아내려 애썼다. 세찬 소나기 때문에 창밖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택시 안에서 한 여자의 어깨가 구슬프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