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 어느덧 초여름에 접어들었지만, 한여름 같이 더운 어느 날이었다.
“과장님,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나머지는 다음 주에 회사에 가서 정리하고, 오늘부터는 잠시라도 편히 쉬도록 합시다. 나는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차 대리랑 민 대리, 현서 씨도 조심히들 올라와요.”
“네, 과장님, 조심히 올라가십시오.”
선준이 과장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과장이 떠나고 막내 사원 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차 대리님, 민 대리님, 저 이 근처가 부모님 댁이라.. 혹시 괜찮으시면 따로 움직여도 될까요... 오랜만이라 부모님이 너무 뵙고 싶어서요....”
“아, 그래요. 현서 씨. 그동안 눈물 콧물 빼면서 고생 많았죠? 이 근방으로 출장 올 때마다 부모님 생각난다고 몇 번 말했었잖아요. 시간이 촉박해서 들르지도 못하고 안타깝긴 했어요. 어차피 주말이니까 편히 움직여요. 다음 주에 회사에서 봅시다.”
현서가 화색이 돌며 은수에게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익숙한 곳이라 터미널로 찾아갈 수 있다면서 먼저 출발했다.
“이야~ 이제 드디어 일이 끝났네요. 차 대리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 데이트해야죠?”
“네에~ 민 대리님, 참 수고 많으셨는데~ 어째 그 말 안 나오나 했네요. 후훗. 누가 운전할래요? 내가 먼저 할까요?”
“깍듯하게 모실 테니 우선 옆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안전 운전해 드리겠습니다.”
선준은 운전을 하면서 옆에 앉은 은수의 손을 잡았다. 은수도 미소를 짓고는 차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선준이 말했던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고, 은수는 선준에게 사귀자고 대답을 했다. 사내 연애이기에 조심스러워서 당분간 사귀는 것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남들은 모르는 달콤한 연애의 시작도 잠시, 은수와 선준은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가끔은 지방 출장도 다니면서 두 사람 다 정신없이 지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 출장을 마지막으로 프로젝트도 어느덧 마무리에 다다르게 되었다.
“우리 어디로 가요?”
“생각해 둔 데가 있으니 따라만 오십시오.”
선준의 말에 은수는 믿고 맡겨보기로 했다. 이 얼마 만에 갖는 시간인지. 단 둘이 있을 시간이 거의 없어서 이 데이트가 너무나도 설렜다.
차는 한참을 달리고, 어느새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내린 곳은 아직 낮시간이라 그런지 한적한 정원이었다.
“아, 시원하다. 날도 더운데 이렇게 그늘진 곳으로 걸으니까 좋은데요.”
은수는 선준의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이 길이 참 좋았다. 이름을 다 모를 정도로 많은 나무들이 높게 자라고 있으면서 그들이 걷는 길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땅도, 시원한 그늘이 진 땅도, 함께 걷고 있는 이 순간도 모두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투둑 투둑.
“엇, 비다!”
“빨리 저쪽으로 가요.”
두 사람은 내리는 비를 피해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 섰다. 나무들에 가려져서 그런지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는 비가 별로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비가 곧 그칠 수도 있으니까 잠시 이렇게 있어봐요.”
선준이 말했다.
“햇볕이 쨍한 날에 갑자기 비라니. 여우비네요.”
“근데 아까 우리 둘이 뛸 때 꼭 영화 같지 않았어요?”
“선준 씨, 영화는 무슨.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옛날에 영화 뭐더라.. 그 <클래식>인가 유명한 장면 있잖아요. 조인성이랑 손예진이랑 비 오는 날에 머리에 옷 두르고선 같이 뛰던 거요. 우리 꼭 그 사람들 같았네. 나는 조인성, 은수 씨는 손예진.”
“아, 기억나요.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손예진, 선준 씨가 조인성이라고 하는 건 아니죠~ 누가 들으면 우리 돌 맞아요. 큰일 날 소리!”
선준의 농담인 줄 알면서도 은수는 배우들의 팬이 숨어서 지켜보는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척했다.
“아, 맞다. 내가 조인성은 아니죠. 드라마를 같이 찍었던 그 사람이어야지. 그래야 현실 커플 아니겠어요? 그럼 돌 맞을 일도 없을 테고요.”
“네?”
은수가 시답잖은 농담에 피식 웃었다. 별 것 아닌 걸로도 자꾸만 웃음이 나는 걸 보면 자신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나 보다.
선준은 은수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에 갖다 댔다.
“여우비가 내리더니 은수 씨한테 홀렸나 봐요. 내 심장이 당신만 보면 세차게 뛰어. 내 눈에 당신밖에 안 보여. 나만의 손예진 해요. 아니 연예인 이름 붙일 필요 없어요. 은수 씨는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이니까. 나만의 사람. 사랑해요.”
선준의 고백에 은수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달콤한 입술을 느끼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여우비가 그치며 무지개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