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은은하게 새어 들어왔다. 은수는 다사로운 햇살을 즐기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팔 아프지 않아요? 집에 베개가 하나밖에 없어서..”
“괜찮아요. 난 언제든 은수 씨의 전용 베개가 되어줄 수 있으니. 내 팔베개가 훨씬 낫지 않아요?”
은수는 옆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선준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남의 팔을 베개로 삼아서 누워 있는 게 편할 리가 없었다.
어려서 엄마 팔베개 정도나 하고 잤었지, 살면서 얼마나 그랬다고..
그렇지만 분위기상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저 미소 짓는 걸로 대신했다.
어젯밤,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선준과 헤어지기 싫어서 시간이 흐르는 게 야속할 정도였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서 은수는 마음과는 달리 그를 붙잡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왜 그리 쑥스러운지.
로맨스 소설 보면 여주인공은 잘도 말하던데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부끄럼을 탔나..
하지만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그를 계속 쳐다봤더니 자신의 마음이 드러났나 보다. 선준은 잡고 있던 은수의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끼고 힘을 주어 잡았다.
“은수 씨, 이렇게 헤어지기 싫어요. 오늘은 당신을 좀 더 욕심내고 싶어.”
허락을 구하는 그를 바라보며 은수 역시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있어요.”
격정적이었던 밤의 시간은 지나고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사랑해요.”
선준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은수가 말했다.
“내가 더 사랑해요.”
선준은 은수의 입술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은수는 눈을 감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 두 사람만의 달콤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2년 뒤,
“우리 셋이 같이 누워 있다니 진짜 오랜만이다. 그렇지?”
은수가 말했다.
“그러게. 우리가 치맥은 즐겨도 잠은 편하게 자라고 각자 방에서 자고 그랬으니까.”
유나가 대답했다.
“결혼하기 전에 너희들이랑 이렇게 하고 싶었어. 다들 내 소원 들어줘서 고마워.”
서인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며칠 뒤면 서인이 결혼하는 날이다. 서인은 건우를 밀어냈지만, 건우는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이 서인의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서인은 유학 시절 건우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이해하게 되었다.
무능하고 빚만 잔뜩 졌던 아버지를 가끔 원망하고 미워했던 자신도 이렇게 마음이 헛헛한데, 가장 존경하던 어머니를 떠나보낸 그는 어떻게 버텨냈던 걸까.
그 뒤로 서인은 건우에게 가족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함께 하고 싶었다. 이제는 더 이상 울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집에 여분 베개가 없어서 은수 네 꺼 좀 들고 오라 했는데, 이 캐릭터 베개는 뭐야? 은수야, 이런 취향이었어?”
유나가 놀리듯이 물어봤다.
“아휴, 말도 마라. 우리 댕댕씨가 커플 베개 하자고 졸라대서 이거 했잖아. 회사에선 멀쩡한데 가끔은 보면 되게 유치해. 뭐, 그런 면이 귀여우니 댕댕이지만.”
은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번에 보니까 서인이 결혼한다는 말에 선준 씨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이던데.”
“그래, 난 솔직히 우리보다 너네가 더 빨리 결혼할 줄 알았어. 선준 씨 너 바라볼 때마다 하트가 뿅뿅하다 못해 아주 그냥 넘쳐서 쏟아질 것 같던데.”
“아우~ 안 그래도 결혼하자고 난리였지. 내가 과장되면서 더 멋있어졌으니 누가 집적댈까 봐 걱정이라나 뭐라나. 참나, 자기 눈에만 그렇게 보이지 뭘.
그래서 우선은 공개 연애하는 걸로 합의했어. 선준 씨도 승진하면 그때 결혼하자고.”
“오호라, 그래서 손에 못 보던 반지가 생겼다 이 말이군~”
유나가 은수의 손을 들고 반지를 봤다.
셋은 웃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서로가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앞으로도 서로의 위치는 다르더라도 언제까지나 함께할 우정이었다. 그렇게 셋의 추억 이야기로 밤이 깊어갔다.
서인의 결혼식 당일.
“은수 씨, 오늘도 정말 예뻐요. 신부보다 더 예쁘면 내가 곤란한데.”
선준이 운전을 하며 말했다.
“헛소리 그만 하시고요. 운전에나 집중하세요.”
은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내가 꼭 부케 받아야 해요? 서인이 친구들 중에 곧 결혼할 친구도 있다는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서인 씨랑 건우 형님 다음에는 무조건 우리 차례죠.”
“아이고. 민 대리님, 승진하기 전에는 안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부케 받고 3년 안에 결혼해야 한다는데 자신 있어요?”
“차 과장님, 저 못 믿습니까? 이 오빠 한 번 믿어봐요.”
“그러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히면요?”
은수가 놀리듯이 물었다. 선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3년 안에 승진할 걸 알지만 일부러 놀려댔다.
“3년 안에 승진 못하면.. 은수 씨 우렁 총각 해야죠. 옆에 찰싹 붙어서 밥도 차려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밤에 힘도 써주고~~”
“대낮부터 못하는 소리가 없어요!”
“은수 씨가 좋아하는 그 로맨스 웹소설에 나오는 절륜남, 그거 나잖아요. 내가.. 뭐였더라. 아, ‘낮져밤이’ 스타일인데. 안 그래요?”
어휴.. 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준은 얼마 전에 은수가 다운받아 읽고 있던 로맨스 소설을 슬쩍 보더니, 은수에게 ‘낮져밤이’가 뭐냐고 물었다.
낮에는 여주인공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다 맞춰져서 지는 거라면, 밤에는 남주인공이 절륜하게 덤벼서 여주인공에게 이기는 느낌이란 뜻이라고 설명해 줬더니 고걸 여기서 써먹는다.
은수는 피식 웃으며 선준의 손을 꼭 잡았다.
“우와, 서인이 진짜 예쁘다!”
“서인 씨, 결혼 축하합니다.”
“고마워요, 선준 씨. 고마워, 은수야.”
아름다운 신부가 신부 대기실에 앉아서 사람들을 맞이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서인은 특히나 더 예뻤다. 여자라면 이 드레스를 입는 순간 누구라도 반짝일 것이다.
먼저 와 있던 유나가 은수와 선준 커플 옆으로 와서 가볍게 인사했다. 신부 대기실은 서인의 다른 친구들과 서인이의 친척들, 부모님의 지인들이 한 번씩 들러서 축하 인사를 하느라 북적거렸다.
“신부님, 신랑분 여기서 영상편지 찍어야 하는데 어디 계실까요?”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진작가가 서인을 보며 물었다.
“아, 아마 밖에서 인사하고 있을 거예요.”
“내가 데리고 올게.”
은수가 나섰다.
“아냐. 너희 둘이 움직이는 것보다 혼자인 내가 움직이는 게 낫지.”
유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작가님, 제가 신랑 데리고 올게요.”
어디 있지..
유나는 대기실에서 나와 홀을 둘러봤다. 날씨도 화창하고 주말 점심 시간대라 그런지, 다른 팀도 그렇고 서인이네도 그렇고 결혼식장은 하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유나는 저 쪽에서 멋진 예복 차림으로 누군가와 인사를 하고 있는 건우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유나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다른 사람이 먼저 건우에게 인사하며 유나의 앞을 가렸다.
“형, 결혼 축하해요. 어르신께도 인사드렸어요. 아버지도 축하한다고 전해달라 하셨고요.”
“그래, 와줘서 고맙다.”
“현수 형이 참석 못해서 미안하다고, 꼭 가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구요.”
“안 그래도 며칠 전에 현수 전화받았어. 장기 해외 출장이라 못 온다고. 여튼 챙겨줘서 고맙다.”
유나는 뒤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 타이밍이 된 것 같아서 얼른 건우를 불렀다.
“건우 씨, 사진작가님이 신랑 영상 편지 찍어야 한다고 신부 대기실로 얼른 오래요.”
“아, 유나 씨. 알려줘서 고마워요.”
“형, 얼른 가봐요.”
“그래, 너도 식 끝나고 밥 꼭 챙겨 먹고. 나중에 또 보자.”
건우는 남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선, 유나에게 살짝 인사를 건네고 대기실로 걸어갔다.
유나도 다시 신부 대기실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건우와 이야기를 나누며 뒷모습만 보여줬던 남자가 먼저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쳤고, 한순간 시간이 정지한 듯 가만히 있었다.
“오랜만이다.”
“어.. 오랜만이네.”
“유나 씨라고 해서 설마 했는데 정말 너였구나.”
현욱이었다. 그의 여동생과 일적으로 마주친 뒤에, 그에게 서로 인연이 아닌 것 같다면서 끊어낸 뒤로 처음이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신랑이랑 집안끼리 아는 사이야. 우리 형이랑 건우 형이랑 친구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나는 신부 쪽 친구.”
별다른 말을 잇지 못한 채 둘은 한동안 침묵했다.
“아.. 나 다시 신부 대기실로 돌아가 봐야 해.. 먼저 가볼게. 반가웠어.”
유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다. 걸음을 떼려는 순간 현욱이 그녀를 불렀다.
“유나야.”
유나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이따 끝나고 차 한 잔 할래?”
“그래. 그러자.”
유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대기실로 걷기 시작했다.
그와 끝내기 전에 그에게 했던 말이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우리가 정말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땐 나도 솔직하게 대할게.’
유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계속 걸어갔다.
장미가 피는 아름다운 계절 5월, 행복이 찾아드는 봄날이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