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라는 말의 함정
“전 아무거나 잘 먹어요.”
남편과 결혼하기 전, 아니 연애하기 전 썸 타던 시절에 이런 말을 했었다. 내가 얼마나 무난한 성격인지, 까탈스럽지 않은 ‘여자’라는 걸 어필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나와 연애를 시작해!’라는 텔레파시를 마구마구 보내면서 말이다.
그리고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하지만 달달했던 초반이 지나가고 연애 중반에 접어들자, 데이트 시간의 반을 메뉴 고르기로 흘려버렸다.
“나 아무거나 잘 먹어. 오빠 먹고 싶은 걸로 골라.”
“그래? 그럼 오늘은 매운탕 먹을까?
“난 생선은 좋아하지만, 생선탕은 못 먹는데..”
“그럼, 돼지고기 주물럭 먹을까?”
“아.. 근데 나 삼겹살은 좋아하는데 양념된 주물럭은 별로 안 좋아해.”
썸 탈 때와 달리 태세가 전환되니, 우리는 만날 때마다 이런 문제로 투닥거렸다.
“넌 뭐든 잘 먹는다면서 왜 내가 말하는 것마다 싫다고 해? 그냥 네가 골라라.”
짜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내게 말하던 그. 당시 남친이었던 남편의 빡침이 느껴지는가?
“나 진짜 잘 먹거든. 근데 디테일하게 넘어가니까 조금씩 가리네.. 하핫.”
‘아무거나 잘 먹는다’라는 말에는 누구나 아는 함정이 있다.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 우리는 ‘아무거나 잘 먹는다,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 등 먹는 음식 취향을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게 된다. 그런 뒤에 상대방과 더 사이가 가까워지면 그때부턴 까다로운 아니 세부적인 음식 취향을 제대로 알려주게 된다.
‘그런데 어쩔 것이냐. 그래서 내가 싫다고? 헤어질 게 아니면 나한테 맞춰 줘야지.’
결국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소해지는(!) 이유로는 나와 헤어지기 싫었는지, 남친은 투닥거렸지만 그것을 참아냈고 내 남편이 되었다.
그리고 결혼생활 10년 차, 식탁은 전쟁이다.
“오늘 저녁 뭐 먹지? 맛있는 거 먹자.”
“그래, 오빠 먹고 싶은 걸로 시켜. 아무거나 먹어도 돼.”
“그래? 그럼 ㅇㅇㅇ 먹을까?”
“아니, 그건 내가 안 좋아하잖아. 오빠는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몰라?”
“싫다고 할 거면 왜 아무거나 먹자고 그래?”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익숙한 말다툼, 익숙한 풍경이다.
‘아무거나’는 정말 ‘아무거나’가 아니다. 말하는 이의 음식 취향이 철저하게 숨겨진 말이다. 무턱대고 그 말을 듣고 히죽거리다간 나중에 싸움각이다. 그 달콤하고 둥글둥글한 말에 속지 말도록. 모두 다 각자의 취향이 있기 마련이다. 둥글둥글한 화법은 상대를 배려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사탕발림일 수도 있고, 때론 일방적인 희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