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여름 안에서

by 달해슬


“하늘은 우릴 향해 열려 있어. 그리고 내 곁에는 네가 있어. 환한 미소와 함께 서 있는, 그래, 너는 푸른 바다야.”

(여름 하면 떠오르는 노래, 듀스의 <여름 안에서>)



20대의 어느 여름날, 4명의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간 바닷가는 고운 모래와 깨끗한 바닷물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이곳은 매점도 없이 한적하니 사람들도 적당했다. 우리들은 돗자리를 펴고 짐을 내려놓은 뒤 앉았다. 그런데 아뿔싸! 그늘 하나 없는 백사장 아래에서 태양은 뜨거웠고 우리에게는 텐트는커녕 파라솔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다들 친구들과 처음으로 오는 바닷가 여행이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순간 파라솔을 들고 나타난 한 친구의 남자 친구. 알고 보니 친구의 남친이 여자 친구를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날짜와 장소를 맞춰서 자신의 친구들과 이곳으로 여행을 온 것이었다. 친구의 남자 친구는 우리 모두 아는 사이였고, 파라솔을 흔쾌히 빌려주는 고마움에 감동을 받았다. 그렇다고 서로 합석하진 않았다. 이는 말 그대로 서프라이즈였으니까.

파라솔 그늘 아래서 편하게 앉아 쉬다가 바닷가에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바닷가에 온 게 처음이라 막연하게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갑자기 해파리가 내 다리를 쏘면 어떡해, 아니면 물속에서 놀다가 파도에 휩쓸려가면 어떡하지?


타고나길 겁 많은 성격이라 티비에서 봤던 바닷가 재난 사고 영상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었다.


“난 물에 안 들어갈 거야.”


나는 혼자 버티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발도 안 담근다고?”

“말도 안 돼!”

“그래, 그러지 말고 같이 놀자.”


계속되는 친구들의 회유에 발만 담그기로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선 조심조심 백사장을 걸어 나갔다.

“난 여기에서 구경만 할게.”


바닷물이 종아리 절반 정도만 닿는 곳에 서서, 더 이상 깊은 곳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으악, 뭐, 뭐야!”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누군가가 가만히 서 있던 나를 자신의 어깨에 둘러업고 바닷물 깊은 곳으로 걸어갔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나 진짜 무거운데!


내 키는 165cm에 몸무게도 제법 통통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짐짝처럼 둘러업고 가는 것일까? 머리가 흔들렸지만 집중해서 보니 나를 둘러업은 이는 뜻밖에도 친구 남친 무리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랑 안면이 있어 인사 정도는 하던 사이였다.

내 무게를 견뎌내는 그에게 살짝 미안하면서도 다소 안심이 되었던 건 그의 키가 180cm가 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보기에도 단단한 팔근육과 초콜릿 복근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나를 둘러업지 못하고 넘어지기라도 했다면 서로 얼마나 민망했겠는가.

그렇게 나를 둘러업고 물속을 걸어가던 그는 갑자기 가만히 서 있더니 내 허리를 붙잡았다. 그 순간 ‘풍덩’ 하며 내 몸이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어푸푸, 살려줘!”


팔을 파닥거리며 있노라니, 그가 내 손목을 잡고 나를 끌어올렸다. 서서 보니 바닷물이 허리밖에 오지 않았다. 겨우 허리선에 오는 물속에 빠져서는 살려달라 외쳤던 것이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나를 향해 씨익 웃는 그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나 역시 같이 웃고 말았다. 마치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살면서 남자 친구도 남편도 이렇게 해준 적 없었는데, 강렬한 추억 하나가 가슴에 박혀버렸다.

그리고 그 친구와는 썸의 ‘ㅅ’은 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웃음)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산뜻하게 간직하는 추억이다. 처음으로 먹어 본 바닷물은 눈과 코를 아프게 했지만, 입수한 이후로 바다는 해파리의 놀이터도 아니었고, 파도에 떠밀려 구조 요청을 해야 할 무서운 곳도 아니었다. 바닷물에서 첨벙첨벙 놀고 나서 차가운 물로 씻어내면 그만인 즐거움 가득한 곳이었다.



이제는 내 아이를 하늘 높이 번쩍 들어 올려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는 괴력의 애엄마가 되었다. 여름의 바닷가는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즐기는 신나는 물놀이 공간이다. 하지만 뜨거운 햇살, 시원한 바닷물, 다부진 어깨, 그리고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가슴 설레는 여름도 가슴 한편에 존재한다. 내게 여전히 여름은 눈부시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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