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지만 숨겨둘 수밖에 없는 물건

은밀한 취향, 나만의 보물

by 달해슬

​로맨스 소설 덕후로서 가장 아끼는 물건은 당연히 <로맨스 소설>이다. 대학생 때 가정 형편이 넉넉해지고 내 용돈으로 눈치 안 보고 수위 높은 로맨스 소설책을 살 수 있을 때부터 소설책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만화책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어린아이 수준의 용돈을 받아 살만한 것들은 만화책뿐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순정만화 잡지가 매달 나올 때마다 친구와 돈을 반반씩 보태서 사모았다. 공동의 물건이라 어떻게 보관할 것인지 상의 끝에 원하는 만화를 찢어서 나눠갖기로 했다. 그러면 집에서 보관해도 들키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가난한 형편에 부족한 성적이 더해지며 엄마와 대립하게 되었다.


“공부 좀 해라! 쓸데없는 것 모으지 말고!”


엄마가 한심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감정이 격해진 나는 상자에 모아둔 만화 잡지를 모조리 꺼내 신발장 쪽으로 집어던졌다.


“이까짓것, 버리면 되잖아요!”


이 말을 하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오면서 만화 잡지 위에 엎드려 목놓아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만화책을 다 버렸다. 그리고 용돈으로 받은 돈으로는 절대 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다 스무 살 무렵, 나아진 형편 덕분에 용돈이 두둑해졌다. 그 옛날 결심했던 것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재미있게 읽었던 로맨스 소설책을 중고로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이 책들은 발간된 지 10년은 지난 것들이었다. 도서관에서 한 번씩 빌려 읽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꼭 소장하고 싶어졌다. 타인의 손때가 묻지 않은 책들이 내 책장을 채우고, 언제든 읽고 싶을 때마다 편히 꺼내 읽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소설책들은 수위가 높아 우리 집에 두기엔 표지가 영 신경 쓰였다. 책등에 쓰인 선정적인 제목과 표지에 찍힌 선명한 빨간 띠. 아직 내 돈 주고 사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책을 구입하게 되면 상자에 담아 박스를 봉한 뒤 책상 아래 저 구석에 처박아둬야 했다. “마이 프레셔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 절대반지를 바라보며 외쳤던 것처럼, 빛을 못 보고 어둠 속에서 숨죽여 지내야 했던 내 소설책 상자를 한 번씩 꺼내면서 아쉬움에 눈물지어야만 했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독립을 했다! 결혼하면서 내 집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내 방을 꾸미고 책장을 사서 로맨스 소설책을 다 꺼내서 꽂아두자.’였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내 집이 생기면서 드디어 나의 보물들을 책장에 가지런히 꽂을 수 있게 되었다. 이 희열감이란! 남편의 눈치 안 보고 책을 꺼내 하나하나 열심히 먼지를 닦으면서 책장에 꽂았던 생각이 난다. 한동안은 참 열심히 정성스레 책을 아꼈다. 책 위에 쌓인 먼지도 닦아주고, 책장에 예쁜 장식품을 놓아두며 꾸미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기쁨도 잠시! 육아를 하면서 아이들이 한글을 읽기 시작하고 서서히 엄마의 책장을 노리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혹시 책 제목을 읽고 어린이집에 가서 말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오 마이 갓~!!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로맨스 소설은 내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자 나의 보물이지만, 이것은 나를 아는 주변인들에게 대놓고 드러내기 힘든 은밀한 취향이다. 로맨스 소설 덕후는 온라인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다. 현실에서 지인들에게 내 은밀한 취향을 드러내는 것, 소위 로밍아웃(로맨스 소설 + 커밍아웃)을 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내가 눈물을 머금고 선택한 방법은 책을 돌려서 꽂아두기였다. 책 제목이 보이지 않게 꽂아둔 것도 모자라 일반도서들로 바리케이드까지 쳤다.




그렇게 내 보물은 다시 숨죽이며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빨리 아이들이 커서 엄마의 책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때를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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