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는 미혼이라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건 나와 다른 세상 속의 삶이었다. 접점도 없었고 이해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30대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내 세상은 180도 뒤집어졌다.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아이를 키우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내 세상의 중심을 온전히 나로 두고 싶었으나, 어느새 한가운데에는 아이와 남편이 있었다. 나 자신은 뒷전으로 사라지고 내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아이에 대한 자랑이나 걱정거리, 또는 남편과의 불화였다. 이걸 공감해주지 못하는 이들과 굳이 어울릴 필요가 없다며 스스로 벽을 세웠다.
전업주부가 되니 일하는 워킹맘들과도 소통하기 힘들었다. 그건 내 속의 질투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육아까지 해내는 슈퍼맘들이라 내 처지와 비교했을 때 레벨의 간극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얄팍하던 인간관계를 이러저러한 이유로 다 끊어내고 맘 카페에만 갇혀 살았지만 불편함이 없었다. 엄마가 된 친구들과 만나면 되었고, 온라인상에서 소통은 얼굴이 안보이니 오히려 더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을 몇 년 하다 보니, 나는 나를 잃어갔다. 이번에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을 해도, 친구들을 만나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육아 이야기를 막을 수가 없었다. 기승전육아 아니면 기승전남편이었다.
내가 엄마 역할을 만족스럽게 해내고 있었다면 달라졌겠지만, 집안일도 요리도 아이의 교육도 그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완벽한 엄마가 되길 바랐던 것도 아니었다. 보통만 되어도 좋았으련만 주부 10년 차가 다 되도록 만족도는 늘 바닥이었다.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사는 것 같아서, 자존감은 지하 땅굴을 파고 들어갔고 육아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돌파구가 필요했을 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는 걸로만 끝내고 싶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품고 살고 있다고 알리고 싶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가 아니라 오롯이 나 한 사람의 존재로서 인정받고 싶어 졌다.
그리고 이제야 아이가 없거나 결혼은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세웠던 벽을 조금씩 허물려고 한다. 그들은 가만히 있었을 뿐 등 돌리고 거부했던 건 나였다. 아이 엄마인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단정 짓고 차단했었다.
나는 ‘남의 집 애’라는 말이 좋았다. 그러면 나는 ‘남의 집 엄마’ ‘남의 집 아빠’ ‘남의 집 이모 삼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고 좋아하고 샘내고 안심하고 걱정하면서 ‘남의 집 애’를 같이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나도 한몫을 할 수 있다. 양육자가 아니어도 ‘남의 집 어른’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엄마가 된 친구와 나는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살아간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끝까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친구 역시 아이 없이 나이 들어가는 나의 삶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 자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 예전처럼 서운하지 않다. 언제든지 손 내밀 수 있는 자리에, 잘 보이는 곳에 내가 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181쪽
김소영 작가의 책에서처럼 그들은 양육자가 아니더라도 ‘남의 집 어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좁은 식견으로 그들이 못할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아이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과 무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그 대신 두 사람은 공통된 관심사 이야기를 나눈다.
로라는 말한다. “그 친구는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에 여전히 관심이 많아요. 아기는 잠깐 미뤄둘 수 있는 친구고요. 세상에는 그럴 수 없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내 생각에 그 친구는 아기와 관련된 대화는 다른 부모들과 나누고, 나와의 관계는 우정을 헤치지 않는 방식으로 유지하자고 타협한 것 같아요. 그 친구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우정과 관련해 엄청나게 많이 생각한 게 분명해요.”
케이트 카우프먼, <당신은 아이가 있나요?>, 113쪽
카우프먼의 책 속 여성들처럼 아이가 있어도 상대방을 배려해서 육아가 아닌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데도, 고민도 하지 않고 귀 막고 눈감아버렸다. 완벽한 공감을 못하는 너는 필요 없다고. 사실 그 누가 완벽하게 공감을 해주겠는가. 같은 엄마들이어도 각자의 상황이 다른데. 내 선입견에서 나온 비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오래전 그렇게 벽을 세우고 등 돌린 친구가 있었다. 이러한 마음을 밝힐 수가 없었다. 나와 너는 상황이 다르니 공감대가 없어서 연락을 못하겠다고, 할 말이 없다고.. 안부 인사만 하던 연락조차 끊어버리고 살았다.
마음 한편이 무거웠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저 내 시야가 좁았을 뿐이다. 내 경험으로만 판단하면서 남들 역시 그러할 것이라 단정 지었다.
<당신은 아이가 있나요?> 책을 읽으면서 그 친구를 떠올렸다.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는 걸 이제야 깨달아서.
“아이 키우고 사느라 바빠서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어.”
이런 핑계를 댔던 내가 참 못났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