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을, 엄마가 되었다. 육아서를 공부하며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 언어 발달에 책 읽기가 좋다고 하니 그림책을 잔뜩 사들여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한 번이라도 더 읽어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이는 책에 관심이 없었다. 어떤 아가는 돌 전부터 그림책을 본다는데, 우리 아이는 책을 읽히려 들면 뺏어서 던졌다. 싫다고 몸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어쩌다 책에 관심을 가질 땐 책을 찢거나 씹으면서 웃었다.
“우리 애는 다른 애들보다 좀 느린 것 같아요.”
친정 엄마를 보며 하소연했다. 책을 거부한 것부터 심상치 않더니 말이 트이는 것도 느렸다. 육아서에서 보면 두 돌 전후로 말을 한다는데, 우리 아이는 두 돌이 지나도 ‘엄마, 아빠’를 제대로 못했다.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손에 꼽힐 정도였다.
불안한 마음에 맘 카페를 찾았다. ‘늦게 터지는 애들이 있어요. 그래도 한번 시작하면 문장으로 쭉쭉 말해요.’ 다른 엄마들이 쓴 글이나 댓글에 위안 삼아 기다리기로 했다.
세 돌이 지나고 드디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자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하기의 출발선에서 스타트는 늦었지만 금방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아이가 문장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왜요?’ 병에 걸릴 줄 알았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시간이 흘러도 아이를 보며 ‘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라는 기분 좋은 탄식은 나오지 않았다.
5살에 언어 검사를 한 뒤 또래보다 1년 반 정도 언어 지연 판정을 받았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센터를 다니면서 언어치료를 받았다. 비싼 돈도 문제였지만 아이에 대한 교육관이 남편과 달라서 무던히도 싸웠다.
남편은 말했다.
“좀 더 느긋하게 기다려봐. 네가 애를 이상하게만 보고 있으니 뭐든 못마땅한 거 아니야?”
그걸 듣고 소리를 질렀다.
“이러다 시기 놓쳐서 영영 문제가 되면 어떡할 거야? 남들이 우리 애를 보면서 쟤 이상하다고 뭐라 하면 오빠는 감당할 수 있겠어?”
결과적으로 몇 개월 뒤에 아이의 언어는 또래 수준으로 올라왔다. 이게 남편의 생각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처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나아진 것인지 모른다.
현재 초등 입학을 앞둔 아이는 발음도 좋고 무난하게 말한다. 한글도 읽고 쓸 줄 알며 그림책도 좋아한다. 혼자 읽다가 궁금한 건 질문도 하고 새로 알게 된 지식은 우리에게 자랑스레 알려주기도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우리 아이는 내가 세운 기준 속에서 항상 느렸다. 남들보다 느려요, 남들보다 못해요, 남들보다……. 아이가 기대에 못 미쳤을 때마다 좌절했다. 누군가 엄마는 강하다고 했지만, 아이 앞에서 나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 약함은 바로 아이를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했다는 점이다. 어떤 엄마는 같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느긋하게 기다렸을 수 있다. 하지만 난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남들만큼 하면서 살아왔는데 왜 내 아이만 뒤쳐지는지 원망스러웠다. 그건 아이의 잘못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속도대로 자란다. 어지간해서는 부모가 애써도 단숨에 언어 영재가 되지 않고, 언어 교육을 안 한다고 말을 못 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건 부모가 그 속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 교육은 조기부터 하는 게 좋다고 하지만 학교에 가서도 지속적으로 받는다. 뒤돌아보면 단지 몇 년 차이일 뿐이었는데, 그 속에서 남들과 다르다며 못마땅했다. 앞으로도 아이는 계속 자라고 아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은데 고작 1,2년 뒤쳐지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내 기준의 잣대는 타인이었다. 남들과 비교하며 스스로 무간지옥에 들어갔다. 기준을 아이 자체로 두고 키운다면, 아이의 성장을 보며 하루하루가 행복할 것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꾸준히 자라준 아이를 바라보며 엄마는 오늘도 배우고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