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으로 만나는 감성 에세이

눈이 소복 소복 내린 날, 내 머리 맡엔 가야금이

by 가야금 하는 희원

눈이 소복소복 내렸고,

두텁게 쌓인 눈 틈 사이로 삐죽 거리는 햇살 한 조각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쌀쌀한 듯 따스한 듯 때론 달콤 쌉쌀한 온기에

연습하기 딱 좋은 타이밍임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이불에서 방 안으로 자리를 옮겨

고즈넉하게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는 가야금을 살그머니 내 무릎 위에 놓는다.

뭉근한 가야금의 머리맡이 내 오른쪽 무릎을 지그시 누른다.

마치 장판의 온도가 따뜻해지길 기다리는 아이처럼

깊이 있는 울림이 올라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본다.


5분이 지났을까?

기다리면서 생기는 여백이

내가 앞으로 펼칠 여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앙증맞게 보이는 그 여백에 빙긋 웃으며 나의 오른손을 갖다 댄다.


처음에 악기를 만질 때는 약간 설익은 소리가 사각사각 난다.

사각사각

다소 서툴지만,

편지에 진심을 끄적일 때 나는 소리가 산뜻한 음률로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다.


시간 안에 차곡차곡 나의 음을 채울 때면

나는 꼭 그 시간을 다시금 곱씹어본다.

꼭꼭


나무로 만들어진 가야금

자연이 맺는 소리가 내 손끝에 닿아 이야기를 만날 때

농도가 짙어지길 기다렸던 그동안의 잔상들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가야금은 12개의 줄로 구성되어 있으며 '12달'을 담을 수 있다.

연주자의 12달이 관객들의 12달과 함께 모일 때면

사계절의 소리를 현에 담을 때만큼 풍성한 울림이 생긴다.


나는 그 시간을 상상하며 연습에 임한다.

연습하다가 툭 집중이 끊길 때면

가야금의 뒤판에 존재하는 달과 해, 구름을 쓰다듬는다.


달이 내 손끝에 닿을 때면

부드러운 악기판이 마치 바다인 듯

나의 양손이 자유롭게 헤엄치기 시작한다.


뻣뻣했던 현이 여유를 되찾으며 출렁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악보와 숨바꼭질을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음표 오른쪽, 왼쪽 사이사이 나의 감각들을 접어 넣기도 하고

작곡가가 고이 접어놓은 조각들을 찾기도 한다.


한창 조각놀이를 하고 있을 때

가야금은 나에게 위로를 건네기 위해 푸근한 호흡을 내쉬곤 한다.

그 호흡이 내 손과 악기를 받치고 있는 발에 느껴질 때면

마치 엄마 품에 있는 것처럼 포근하다.


핑그르르 내가 뜯는 소리가 줄에 닿는 순간,

나는 가야금이 숨겨왔던 여백과 울림을 뿜어내는 그의 진공 상태를 마주한다.

세상에 가야금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진공 상태 말이다.


발과 내 무릎에 닿아있던 가야금의 머리맡이

하루 끝을 매듭지을 때면

나는 비로소 밤이 왔음을 알아차린다.

나에겐 가야금을 만지는 순간, 가야금을 매듭지는 순간이

나의 하루의 첫 시작이자 끝이다.


물론, 동글동글한 손끝의 모양이 세월의 흔적으로 일그러질 때도 있지만,

그 일그러짐도 나중엔 가야금을 웃게 하는 것이더라


가야금을 웃게 해야

내가 웃고

내가 웃어야 관객들을 마음껏 웃게 할 수 있으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편지 음악에 당신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