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에게는 모든 순간이 '영화'였다

연주하기 전, 연주하는 중, 연주한 후

by 가야금 하는 희원

# 1. 연주하기 전


차디찬 공기,

차가운 공기들이 나를 향해 살갑게 다가오지만,

유달리 더 차갑게 느껴진다.


같은 하늘이어도

같은 호흡이어도

모든 것들이 떨려온다.

어떤 선율들이 나에게 찾아올지, 그 선율이 무수히 많은 감정들을 데려올 것을 알기에

당황스럽지 않은 척

옷매무새를 다듬어보지만, 호흡이 급해지고 긴장되는 건 사실이다.


빨리 끝났으면 하면서도

내 순간이 온통 무대 위로 가득 채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아주 아이러니한 순간,

악보를 틀릴까 봐 혹시 손이 악기 줄 위에서 중심을 잃을까 봐

고리타분해질 시간 없이 그 시간을 걱정도 해보지만,

이러한 순간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을 알기에 겸허하게 그들을 다스려본다.

연주전.jpg 연주하기 전, 숨을 고르고 조율을 시작합니다


# 2. 연주하는 중


차가운 공기, 차디찬 계절

하지만, 따뜻한 온기, 내면에 옹골찬 기운이 나를 다스린다.

왜인지, 그 순간을 차분히 따라가 보는 게 나의 조그만 명상이 되었다.

어쩌면 이는 '명상'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명상일 수 있겠다.


'가야금과 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내 귀와 내 마음에 초대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으로 만들어진 가야금과 내가

인간과 자연을 품고 있는 하나의 작은 지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이 지구가 나의 우주로 형성되는 건

내 연주가 비로소 관객들에게 도달한 시점이다.

우주가 품은 여음이 그들에게 또 다른 세상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12.25 신정호 연주.jpg 해맑게 연주하는 나


# 3. 연주한 후


모든 것을 불태우고 호흡에 열정의 조각이 남아있을 때

관객들의 따뜻한 온기가 곳곳에 끄적여져 있을 때

나는 마치 빗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듯

무대와 함께 했던 순간을 겸허하게 바라본다.


나의 연주로 간지러움을 참고 고요하게 누워있던 가야금을 일으켜 세우며,

그가 영원히 내 간지러움에 빛내주기를 속삭인다

옷을 입혀줄 때면, 포근한 이불에 잠시 쉬었다가

또 좋은 음악으로 나를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연주 후.jpg 연주가 끝나고 악기를 정리하는 나


이처럼

나에겐 가야금을 연주하기 전, 연주하는 중, 연주한 후

모든 순간이 프레임에 하나하나 저장하고 싶은 '영화'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잠 못 이루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