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소한 취미생활 LEGO

철 나면 큰 일이지

by khori

명절 지나고 아침에 보니 놀러 온 누나부터 다들 잘 무수시고 계신다. 어려서 수십 명이 놀러 오던 명절은 당분간 보기 어렵지 않을까? 아이들도 적어지고, 그 아이들 둘이 모여서 다시 하나가 탄생되는 시스템을 생각하면 환경의 영향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자생존이라는 승자 독식의 시스템도 존재하고, 생존을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일 수도 있다. 살만하면 물 흐르듯 굴러가고, 그렇지 못하면 그렇지 못할 뿐이다. 이런 세상도 누가 만드나? 다들 한 팔 거들은 것이고, 애꿎게 아이들에게 한편으로 좋아지고, 한편으로 불편한 환경을 물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미안한 생각이 자주 든다.


휴가라고 그렇게 말했어도 외국 손님들은 메일을 보낸다. 승인용 견본 길이가 0.65mm가 길다고 연락이 왔다. 이건 무슨 소리냐? 사양 변경이 있었던 건이라 처음 보낸 자료, 요청대로 수정한 자료를 다시 찾아봤다. 도면을 머릿속에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니까? 대체로 따지는 사람의 의견은 이유가 있다. 잘 경청해야 하는 이유다. 일리가 있고, 논리적이고 타당하다면 부합할 필요가 생긴다. 요즘 마가가 유행이라 마가 끼었나 고객님 말씀은 옳다. 천천히 자료를 보니 처음 보낸 자료보다는 0.35mm가 짧고, 두 번째 보낸 최종자료보다는 0.65mm가 길다. 왜 이런 걸까? 우선 고객과 확인해야 할 사항을 급하게 회신처리했다. 휴가 중이니 생산부서는 출하검사성적서, 승인원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실수라면 원인이 쉽게 파악될 테니 조치해야 할 일이고, 문제가 있다면 푸닥거리를 해야 한다. 그래도 성깔 안 부리고 차분히 물어봐주는 오랜 친구 같은 고객이니 감사해야지 뭐. 휴일이고 나발이고 이걸 사무실에서 하고 있는 내 팔자가 문자지. 눈으로 봐도 얼마 안 되는 길이이나 이게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일도 있다. 짜증은 내서 무엇하리, 물리적으로 입증된 것은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내게 이로울 뿐이다. 이것 때문에 아침부터 슬슬 사무실에 나가보기로 했다. 어제 정리한 봉다리도 챙기고.


방안에 가득 있는 책은 정리하기 힘들고, 300권 이내 관리 목표를 잘 준수하고 있다. 남는 책은 사무실에도 두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기도 한다. 중고서점에 가서 사기는 하는데, 중고서점에 가서 팔지는 않는다. 이런 게 잘 안되다니까. 그 반쪽에는 레고가 잔뜩 있다. 박스부터 부품, 그리고 작은 봉다리 제품들도 있다. 잠시 짬을 내서 조금이라도 정리하면 대충 우레고, 좌책의 공간을 잘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안 혼나게 잘 정리하고 있다. 가끔 마나님이 이걸 어떻게든 잘 떼려 넣는다고 감탄을 할 때가 있다. 작은 소망이라면 내 방의 4~9배 정도의 공간에 한쪽은 책, 한쪽은 레고 디오라마를 하고 싶었는데.. 글쎄다. 소박맞기 딱 좋은 생각보단 손에 잡은 작은 비닐 봉다리를 들고 사무실에 왔다.


KakaoTalk_20251007_134116999.jpg

폭스바겐 T1 캠핑카. 봉고 스타일의 캠핑카다. 폭스바겐 라이선스가 붙어 있다. 작년 슈투트가르트에 갔을 때 본 옅은 연두색 컬러의 캠핑카를 봤는데 유럽식 건물과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었다. 빨간색이 아니라 명암비가 확실한 흑백으로 찍어봤는데 아주 맘에 든다. 그보다 작년 폭스바겐 프로젝트가 잘 되었다면 지금쯤이면 한 번 가보자고 주장하던 이비자 구경은 했을 텐데. 올해 스페인에 갈 때 이비자를 가보자는 녀석이 생각나네. 큰 나라에 살면 거리 개념이 없는 것인지 다른 것인지. 6월에도 가까운 거리라며 택시 타라고 해서 150km 택시를 탔다. ㅡㅡ;;;;


KakaoTalk_20251007_134116999_02.jpg


손에 굳은 살도 이젠 없고, 오래 장시간 쭈그려 앉아서 하면 허리가 남아나질 않는다. 가끔 저걸 다 팔아버리겠다던 마나님도 요즘은 뜸하시다. 조금씩 모아 둔 것이 나중에 할아버지 돼서 애들 좀 만들어주고 만들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자신감이 떨어진다. 허리 아프고, 뵈는 게 없어지고..


옛날 네덜란드 출장 갔다가 할머니가 옛날 레고를 파시길래 이것저것 골라서 사는 나를 보며 웃으며 한 말이 생각난다. 짧게 해석해 보면 "우리 집 영감탱이가 이걸 창고에 잔뜩 사놨다니까! 아주 어마어마하게 있어서 내가 조금씩 내다 팔고 있지 ㅎㅎ'이 정도 수준으로 보면 된다. 방긋 웃으시면 덤을 얹어주시며 건네준 다정한 말씀을 잘 새겨보면 '이런 똑같은 놈이 왔네'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미래에는 이런 일이 뜸하겠지? 공터랑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이 사라져 가고 다시 늘어나는 걸 보기 힘든 시대니까.


레고를 하면 동안, 부품을 찾고, 조립하느라 집중하게 된다. 잡생각이 없어진다. 다 만들고 나면 성취감 비슷한 만족감이 든다. 꼭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을 네모난 부품으로 쌓다 보면 어느덧 현실에 구체화되어 간다. 인생도 하루하루 하나씩 무엇을 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생이 즐겁고 골치 아픈 이유라면 매뉴얼이 없으니까? 꼭 그렇게 해야 할 당위성이 없는 것이기도 하고, 또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게다가 뭐가 될지 지금 나는 잘 모를 수 있다. 아니지 그건 또 상상하기 나름이다. 영화 양자역학의 말처럼 '생각은 현실이 된다'라는 말을 신뢰하는 편이다. 당연히 옆에서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감탄사를 이 나이에도 듣게 되는 이유다. 나보다 더 한 T 같다니까. MBTI를 90년대부터 체험한(주변인이 심리연구소를 운영 중임) 입장에서 나도 꽤 T가 높다. 그런데 나이 들고 상황에 따라 F가 나오기도 하고, E성향이 강했는데 I가 종종 나오기도 한다. 노는 게 제일 좋은 시절을 많이 보내다 책을 보고, 세상 풍파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태생적으로 낮은 부분이 개발되기도 하는 것인가? 본성과 훈련된 성향이 짬뽕된 것 같다. 결국 뭐가 되겠지. 망작이 안 나오길 바라야지.


무엇보다 레고는 원근감을 준다. 이렇게 만들고 가까이 보면 시시하다. 그런데 또 멀리서 보면 꽤 그럴싸하다. 채플린의 말처럼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말처럼 레고를 통해서 삶의 원근감, 관조적 느낌을 갖아보는 시간이 나쁘지 않다. 구동 부품들이 들어가거나 곡면을 표현하는 것을 보면 또 가까이 보는 재미도 있다. 이걸 이렇게 한다고? 또는 캐드로 스케치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양한 수학적 접근이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점이다. 난 만들면 땡이고.


아직 녹슬지 않은 손놀림으로 재빠르게 만들고, 남대문 레고 옆에 두었다. 알리에서 뱅퀴시의 '꽃다발을 던지는 남자'도 뒤에 갖다 놨다. 진격의 거인처럼 사람이 제일 크네. ㅎㅎ. 파란 하늘이 깊어질 땐 놀러 다니면 제일 좋은데 뉴스는 여전히 요란하다. 조용한 날이 읎어.


#레고 #폭스바겐 #캠핑카 #천상잡부 #khori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