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커피가게
아침 일찍 다니는 시절을 맞이하니, 예전엔 왜 그게 안 됐지 할 때가 있다. 당시 해외영업을 하며 고객시차에 맞춰 살며 삶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21세기가 되어도 근로기준법을 따지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때 노인네들 보면 집에 가서 할 일이 없으니 앉아있던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든다. 애 보기 힘들다고 매일 야근하는 황당무계한 동료가 있기도 했다.
7:30분쯤 출근길에 들르는 커피가게가 있다. 차 한잔 마시면 담배도 피우고, 오늘 할 일도 생각한다. 그런 봄인지 초여름인지 점빵 직원이 착한 아가씨에서 젊은 총각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다른 커피가게가 없는 것도 아닌 데 가는 길목에 있기도 하고, 일찍 열기도 하고, 그냥 나이 들며 노란색 컵이 좋기도 하다.
어차피 한 잔을 사서 텀블러 3개에 물을 타거나 여름엔 얼음을 넣기도 한다. 병원 가면 간호사 언니들이 믹스커피 당장 끊으라고 온갖 타박을 한다. '하루에 아메리카노 정도 한 잔'이라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는지. 커피 마셨다고 하면 자동반사로 '믹스커피?'라고 되묻는다. 맹사성이 은잔을 늘렸다고 하던데, 나는 물을 왕창 부어마신다. 명절 누나가 갖고 온 가장 좋아하던 블루마운틴 커피를 먹어보려고 했는데 달봉이가 냉큼 먹어버렸다. 식었을 때 걸레 빤듯한 느낌만 아니면 된다. 스벅커피도 손님 볼 때 마시지만 탄맛이 강하다. 콜드브루를 먹는 이유랄까.
맛은 저 나라로 보냈으니 습관적으로 먹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젊은 총각이 드릴만한 게 이것밖에 없다며 먹어보라며 조그만 봉지를 하나 준다. 얼떨결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받아 들었다. 마시멜로다. 중동, 터키 식당에 가면 마시멜로를 흐르는 초콜릿에 찍어 먹기도 하는데 사실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다. 내가 철없는 아저씨처럼 보이나? ㅎㅎ 그러고 9월 말인가 이번에도 내 손에 다시 마시멜로를 꼭 쥐어준다. 나름 매일 아침 나타나는 철없는 아저씨 단골이기도 하지만 궁금하다. 왜일까? 진상 짓도 아닌데 미운 놈 떡하나 주는 걸까? 거참 요상하다.
아침에 만나면 항상 서로 '감사합니다'와 '즐거운 하루 보내요'란 인사를 빼먹지는 않는다. 아침 일찍부터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다. 얼마 전 가족식사를 하러 고깃집에 갔는데, 젊은 처자가 땀은 흐르고, 머리는 치우느라 산발이 되어가는데 부지런하고 친절하다. 팁문화가 없기도 하지만 추가 주문을 하며 만 원짜리를 하나 줬다. 왜 주냐고 묻길래 젊은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보기 좋다고 했다. 오해 없게 외관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서 준건 아니다. 이건 나이 드는 징후가 틀림없으나 뭐 개의치 않는다. 늙는 건 불가항력인데 뭐.
명절 연휴 마지막날인데 오늘도 커피 점빵이 문을 열었고, 그 총각 혼자 있다. 사무실에 막둥이 심심할 때 보라고 소설책을 6권 갖고 출근했다. 그 말은 집에 새 책 6권 이상 넣을 공간을 확보했다는 말이다. 냉큼 한 권을 빼서 보라고 줬다. 책 선물은 읽는 사람에겐 참 좋은데, 안 읽는 사람에겐 짐이다. 컵라면이 유행하고 라면 받침도 되기 힘들다. 나이가 먹으니 눈치가 없는 걸 지도.
인사하고 사무실에 와서 쉬지도 않는 고객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노는 날 사고 친 녀석들은 회의한다고 하는데 결과가 아직 안 온다. 이것저것 시장 동향을 한 번 짚어보고, 본사에는 이런저런 점을 조심스럽게 검토하라고 했다. 그래도 얼떨결에 RFQ 2개를 받았는데, 하나는 지난번에 수주한 시리즈라 별 문제가 없을 것 같고, 하나는 생산성으로 개발하고 만들지 말지 고민인데 이 번 기회를 살려봐야겠다. 내년도 물량인데 잘 됐다. 팀장 녀석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했더니 '얼른 더 받으세요'란다. 전화기 줄이 없으니 무선은 당길 수도 없고, 멱살을 한 번 잡고 싶은데. '닥쳐 ㅋㅋㅋㅋ'라고 회신을 줬다. 하여튼 하면 더 한다니까.
별봉이 달봉이 밥 먹이려고 길을 나서다 앱으로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퇴근길에 들른 커피점빵 총각이 화장실 가다 말고 돌아와서 자기가 이런 소설을 아주 좋아한다면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다행이다. '내가 다음에 또 몇 권 줄게요'라고 했더니 이 번달까지만 하고 그만둔단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봤더니 그림 그리는 일을 한다고 한다. 학생인지 직업인지 모르겠지만 매일 아침 인사하던 총각이 아티스트라니 더 기분이 좋다. 동시에 그만둔다니 섭섭하다. 어디 그림책이 좀 있을 텐데.. 사무실에 두었나? 한 번 찾아봐야겠다. 마침 읽으려던 책이 디자인, 컬러와 관련된 것인데. 올해는 참 희한하데. 지하철에서 쓰러진 녀석 주물러서 119에 넘겼더니 재즈피아노 아티스트라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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