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지도 마라'

불금은 불금이로다

by khori

사업을 손에 쥐어주고 독립을 시키는 중인데 손이 많이 간다. 호언장담과 광 팔기를 일삼더니 무대에 올려놓고 "시작!"이라고 했더니 여간 산만하게 아니다. 성위에서 '돌격 앞으로'하고 최전선에서 '돌격 앞으로'하고는 감이 다르겠지. 이해는 하지만 매일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self로 혼자 맛이 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원래 남이 하는 일은 대충 쉬워 보이지. 감기 몸살 기운이 있어서 하루 일찍 들어가서 일찍 잠들었는데, 다음날 새벽 6시에 사무실에 나와서 A3 한 장을 펼쳐놓고 그림도 그리도 정리도 하고 있다. 많이 써주면 안 보고 한 장으로 정리를 해보려는 목적이다. 본인이 잘하는 것을 제외하고 해보지 못한 것들, 해야만 하는 것들, AI가 가르쳐줄 수 없는 노하우를 정리하게 된다. 나한테 이득이 있어서가 아니라 시작시켰으면 잘해야지. 쪽팔리지 않게. 그렇게 돼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겸사겸사 '이젠 부르지도 마라~'라고 잔소리라도 하지 않겠어. 할 말도 많고, 걱정도 되고, 이것저것 챙기다가도 혼자 넋두리와 욕이 나올라고 한다니까. 살 수가 읎어. 이럴 땐 해야 할 것을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하늘을 한숨 쉬며 가슴에 담는다고 그게 알아서 되냐고!


큰 소리를 입으로 떠드는 것과 배포의 크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입이 크면 책임으로 나중에 머리만 아프고, 입이 너무 작으면 음흉해 보일 수 있다. 배포만 크면 사고 치고 나락 갈 확률이 커지고, 너무 소심하면 기회포착과 발전이 더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데이터를 축적하는 일이다. AI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업, 재무, 회계, 물류등의 자료는 매일매일 기록된다. 그 기록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면 외우려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기억되고, 그 속에서 더 좋은 데이터 기반 인사이트를 알게 된다. 대부분 그 '매일'이란 전제조건에 소홀할 뿐이다.


흑백으로 변환한 영화 '무뢰한'은 글쎄. 흑백으로 바꾸면 색이 사라지고 훨씬 더 선명해진다. 마친 '인사이트', '통찰력'이란 의미를 상징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시선이 더 강렬하게 이끌린다. 마치 내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생긴다. 사진 속 남과 여라는 같은 종 다른 존재, 표정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긴장감.. 저 사이의 공간에 '부르지도 마라'라고 말풍선을 넣으면 어떨까 생각했기 때문일까? 전도연의 '자백의 대가'를 주말에 볼까 생각 중이기도 하고.


이렇게 이 나이에 새벽부터 정리하고, 짐도 내가 싸줘야 하고 게다가 여름에 사고 치고 알아서 한다고 하더니만 이걸 짱박아뒀네. 표정 보니 노답인데 말해 뭐 해. 나도 좀 '부르고 싶다'. 이게 얼마냐! 독립할 때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려고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보는데 '아~나 콩떡'(예전 할머니가 나 놀릴 때 하던 말)이 돼버렸다. 모기 숨 쉴까 말까 한 수준에서 고맙다고 하니 웬일인가 싶다. 그래도 정리 정돈을 해줘야 본인도 배움이 있고 새롭게 좀 잘하지 않겠어. 이걸 말아먹으면 멍석말이를 해야지 안 그래.


그렇게 금요일을 일찍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중국으로 귀양 간 조카 연락이 온다. 한국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다시 장기파견을 갔으니 유배지 유배. '삼촌, 이거 00에서 견적을 내라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메시지가 온다. '어~ 그냥 눈탱이 팍팍 쳐서 기절초풍할 정도로 받아. 지금 엄청 바쁘다'라고 했더니 전화가 온다. 급하다는 소리지. 뭘 막 시키는 거지. 그렇게 부르지도 말라고 했음에도.


사자성어에 조삼모사, 역지사지라는 말은 다 아는 말이지만 실전에 보면 잘하는 사람이 드물다. 조삼모사는 첫판부터 장난질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전개방식에 관한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역지사지는 그냥 엄마가 나를 족칠 때, 연인이나 마나님이 나를 족칠 때 상대방을 생각해 보면 딱 답이 나온다. 예를 들어 천 원짜리 제품에 금칠을 해달라고 하면, 개당 10만 원으로 오른다고 하는 것이 좋은지, 천 원에 금칠비용 10만 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나은지 상황에 따라 판단해 볼 수 있다. 천 원이 10만 원이 되었다는 기분과 금칠값이 십만 원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별차이가 아니지만 상대방 기분이 달라질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제안이라 의도적이다. 무엇보다 내 제안이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그려질 때 어떤 것이 더 좋게 느껴지고, 합리적이라고 디자인될까 생각하고 던질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줘도 저지르고 생각하는 부류는 애 화를 내냐고 싸우거나, 잘못했다고 빌거나, 꽝이라고 넋두리를 하거나 그럴 확률이 오른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오니 어제도 오늘도 고객님은 여전하시다. 자료 요청과 더불어 금요일 저녁에 주면서 월요일에 달라고 한다. Template만 넣으면 AI처럼 자기 알아서 데이터를 채우는 것도 아니고, 시료들이 자동화 로봇처럼 테스트 장비에 기어 올라가 self로 테스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 하라는 거야? 지난번엔 요청도 안 하고 왜 자료를 안주냐고 따지시길래 확인해 보니, 본인이 요청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긴 하다. 빠른 태세전환가 함께 '그럼 하루 더!'라고 한다. 말은 참 쉽지.


2시간 / 24시간 회신 원칙을 갖고 일을 한다. 2시간 이내에는 즉시 회신 또는 받았다를 상호확인, 언제까지 조치하겠다는 회신을 한다. 24시간 안에 정리하고 일정을 세워야 할 경우에는 24시간 내에 자료 또는 일정을 전달하는 것이 개인적인 원칙이다.(내부 또는 가족 같은 애들이 싫어함 ㅋㅋ) 세부적으로 고객이 일하는 시간(working time)에 회신하고, 늦으면 자료는 출근해서 메일을 열자마자 상단에 위치할 시간대를 고려해서 보내기도 한다. 기분이 좋아지니까. 고객과 통화하다 보면 고객님들도 고객님의 고객님들이 그 따위로 업무배정을 해서 본인들이 죽겠다고 먼저 눕는다. 이심전심이다.


오후 3-4시에 보내면 유럽 놈들이고, 새벽 일찍부터 요청하면 미국 놈이고 출근하자마자 난리 치는 놈은 왜놈이거나 그렇지. 하여튼 우리나라에서도 퇴근시간에 업무처리 자료와 메일 몰아서 보내는 무리들이 일 잘하는 종자를 본 적이 없다. 사고 나면 속수무책인 경우가 허다하고.


그렇게 정리하려는 또 고 녀석이 연락이 온다.

"삼촌 계약서 알죠"

"다 리뷰해서 줬잖아. 집에 갈 거다. 부르지도 마라"

"법무팀에서 검토자료 나왔는데 봐달라고 하는대요"

"집에 갈 건데"

"보냈습니다"


실수했다. '부르지도 마라'가 아니라 읽씹의 시간이었는데. 결국 2시간을 더 앉아서 계약서를 보다 '깊은 빡침'만 올라온다. 오래전 심각한 사태 보고를 했더니 대표이사님이 "현명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도록"하고 퇴근하셨다. 깊은 빡침과 헛웃음이 한참 나왔다. 흠잡을 때 없는 간결하고 옳은 말이나 상황상 '네가 알아서 문제없이 잘 처리해'라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뭐가 문제야', '상활을 설명해 봐'가 먼저인데 읽다가 열린 뚜껑 때문에 '본사 법무팀 어떤 shake it이냐!'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내 근방에 있었으면 '그래서', '그런데' 또는 '했어 안 했어', '됐어 안 됐어?', "언제까지?'의 무한푸르 둘 중 하나지. 아니면 물구나무서는 거고. 계약서 리뷰를 보고 대책을 세우라고 했더니 'Delete', 'Pay attention to'라고 주석을 달아놨다. 실무 계약을 오래 해 본 경험에서 이런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심지어 고객 뚜껑 열어서 악영향을 주는 것도 고려 안 하는 법무팀이라면 싹 다 집에 보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을이 갑한테 '이 조항은 지워 오시고요'라고 말할 용자들이 많나? 전 세계 독점도 아니고. '주의를 기울이세요'는 이게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주석이면 고객한테 하는 소리인가? 아님 보고받는 윗사람한테 '잘 보고 네가 알아서 하세요'인가? 가뜩이나 계약의 요체가 "모든 책임은 너의 것으로 하노라"와 '나에겐 권리만 있다"라는 장기 머슴 계약같은 제안이 와서 골치 아픈데 불금에 불이 활활 오른다. (실재로 보면 더 맛이감. 쫙쫙!!)


열린 뚜껑은 열린 뚜껑이고 사탕하나 물고 두 시간 동안 각 조항별로 의견을 달아서 다시 보냈다. 이러다가 정말 만주 변호사가 되겠어.. 어째 자꾸 안 하는 일이 읎다. 뒤끝 작렬해서 회신에 자주 pay attention을 많이 달아서 보냈다. 부록으로 'it requies choice of decision smartly & wisely'라는 문구로 마무리했다. 더 짧게 쓰면 DIY 지 뭐. 물론 이런 걸 고객님께 보내면 멱살잡이 하자는 소리고.. 가족끼리 이 정도는.. 메일 보내고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회신은 안 부른단다.


'회신 보냈다. 검토 한 놈부터 족치거나 공부시키거나 집에 보내거나. 진짜 불 껐으니까 불러도 소용 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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