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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ori Oct 02. 2018

야매

야매가 별건가?

 얼마전 열정적인 사람을 만나서 마스터라고 했다. 옆자리 직원이 그런 나를 야매 마스터란다. 나를 낮춰 이익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염치에 문제가 없다면, 서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낮춤은 크게 마음쓸 일이 아니다. 진심은 어디서나 통한다.


 '야매'라는 뜻을 찾아본 적이 있다. '뒷거래'의 비표준어로 나온다. 검색을 하다보니 그 뜻의 유래와 어원을 잘 정리한 글과 멋진 사진이 있다. 그곳에서 사진도 허락을 안 받았으니 도용을 한 셈이다. 출저를 남겨도 문제가 되면 사진은 지워야 한다. (출처 : http://bryan.wiki/m/175?category=261329)


 '야매'라는 뜻을 찾아본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럼 '정상', '정통', '원조'의 기준은 무엇일까? 원조처럼 처음 무엇을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애매모호한 '일반적인', '바른' 이런 추상적인 단어들이 나온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야매'와 '야매 아닌 것'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구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법과 제도의 측면에서야 구분이 되겠지만, 삶은 흘러가는 시간과 방향 때문에 구분의 의미가 없기도 하다. 평판정도가 영향이 있겠다. 삶은 야매정도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다만 옳지 못한 행동이라면 세상이 그를 드러내주고 '야매'라는 낙인을 찍어준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야매'라는 해석도 경우에 따라서 달라진다. 내가 좀 야매적이다.


 그래서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나의 길을 찾는 이유다. '빨리빨리'라는 속도는 방향이 결정된 후에 능력것 하면 된다. 내가 항상 칼루이스, 우사인볼트, 음바페처럼 빠른 것도 아니다. 냉정하게 모두가 또는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 당연히 잘 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당면과제가 나온 이유이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노인양반들이 그 말을 읊조리다 신과의 면접장으로 행차했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그 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서툴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기준을 세운 녀석이 야매 대왕이다. 자기가 세운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해도 문제가 없어야 하는것 아닌가? 그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야매적으로 다시 할 수 있는 환상(예: 영화)를 만들고 좋아한다.


 집합을 옛날 산수시간에 배웠다. 집합 A란 나를 의미하는 것 같다. A의 여집합은 세상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소크라테스가 모르는게 훨씬 더 많다고 알려줬다. 집합에 대입해서 쉽게 이해했다. 이런 이해도 야매의 범주라할 수 있다. 나는 꼭 교과서를 달달외워서 그 체험을 해야하는 것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쓸수 없는 지식은 나와 거리가 멀다. 결론적으로 나라는 집합 A를 아는 것이 지피지기다. A의 여집합을 이해하는 것이 역지사지라 할 수 있다. 여집합을 이해하는 만큼 세상의 안목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크기가 커진다. 그래서 우리는 교집합을 통해서 조금식 세상과 교류한다. 그 여집합의 존재를 집합으로 보고 이해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데 그 여집합은 끝이 없다. 젠장. 적당히 삶의 폭을 갖고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사람을 산수라는 과목기준으로 표본을 만들면 정규분포에 가깝다. 이 정규분포에서 중간값은 나에게 한가지 의미를 갖는다. 가운데다. 대학, 공자에 나오는 중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를 토막내면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뉜다. 그 잘린 면을 나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 해석은 이 분야에서 절반은 수준이하라는 사실이다. 이런 편의적인 해석은 세상이 원래 수준이하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바라지 않으면 실망이 없고, 잃을 것이 없는 자와는 다투지 말아야 한다. 분야별로 표본을 만들면 모든 개인은 어차피 특정 과목만 집중한다. 장점으로 살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이것도 통상적으로 말하는 의미에서 야매적 해석이다. 주화입마처럼 올라오는 분노와 욕지거리를 참아야 하는 저주가 문제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생각하면, 다행스럽게 모든 인간에게 저주는 공평하게 나눠져있다. 너무 야매적 해석이 비관적인가?


 이런 야매적 접근방식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분야를 붙여서 3차원적인 형상을 만들면 들쭉날쭉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 일도하고 저런 일도 한다. 당연히 서로에게 '수준이상'을 만나는 일은 드물고, '수준이하'를 만나는 일은 일상다반사다. 우리는 남이 잘하는 것보다 잘 못하는 것을 잘 알아챈다. 나같은 야매는 말 할것도 없이 널려있다. 누군가 나에게 야매하고 한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도 자유롭지 않고, 부인할 방법을 찾기도 힘들다.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속을 알 수 없는 것은 인간이 계산할 능력밖의 무수한 무엇인가 때문이다. 게다가 야매라는 변수, fake도 있는 셈이다.


 다른 문제는 시간이다. 전설, 설화, 신화에서 시간을 통제하고 싶은 인간의 갈망은 안습이다. 그래서 시간과 연관된 단어들은 울컥하게 한다. 추억, 기억, 회고, 과오, 회상등 인간의 슬픔과 아쉬움을 담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야매적으로 생각을 하다보면 '수준이상'과 '수준이하'는 시간이 흐르며 제각각으로 변한다. 능력이 하루아침에 늘어나지 않지만 충분한 노력을 통해서 개선된다. 반면 '하던대로'의 법칙을 따라 서서히 주저앉는다. 내려놓음이 아니다. 이게 환장할 노릇이다. 망하는 방법은 아무때나 시전하면 되는데 잘 하는 방법은 참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손자는 전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지 않기 위한 것이 첫 번째 명제라고 했는지 모른다. 


 조금씩이라도 개선의 조짐을 보이는 인간문명의 결과인 물질에 매달리는 이유가 이런 환장할 노릇때문인것 같다. 이런 알 수 없는 수준의 변화무쌍함을 우리는 '착하다'로 무마하려고 한다. 잘하는 것, 특별한 나만의 것이 없는 사람은 무조건 착하다고 우긴다.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매력도 없는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말은 '곱고 어질다'라는 의미다. 참 어지럽다. 하루도 문제가 없는 날이 있을 턱이 없다. 그렇지만 성품이 올곧은 사람(어째든 착하다가 아니라 진짜 착하다)은 큰 장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하다.


 각각의 사람은 맹자님 말씀처럼 착하게 태어나서 오염될 수도 있고, 순자의 말처럼 못되게 태어나서 사람답게 변해갈 수 있다. 알 수 없는 것을 야매는 따지지 않는다. 야매는 현실적이며, 목표에 집중한다. 그래야 성과가 나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경우에는 만인의 호감을 사고, 망한 경우라면 사회적 격리와 왕따를 감수해야 하는 긴장감이 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못된 놈이던 아니라 '착하다'라는 것을 한 줌씩은 들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이것을 가능성으로 놓고 엄청난 노력도 한다. 그러다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가끔 로또가 나온다. 이게 또 환장할 노릇이다. 한편 이 한줌의 착함 또는 거시기를 들고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어?'라고 떠드는 용자들도 있다. 그런데 돌 던지는 용자는 드물다. 매일 막둥이처럼 '네'하고 약속을 어기는 일상을 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에게 할 말 없으면 '착하다'고 거짓말을 밥먹듯 한다. 세상이 제정신을 찾기 힘들다. 그런 정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이런 야매적인 생각을 모아서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그것을 알기 어렵다. 세상의 환경이 바뀌면 나도 얄팍하게 판단이 조금씩 바뀐다. 나의 길을 걷는 것이 어떤 면에서 하던대로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란 기준을 갖고 있으냐의 문제다. 그래서 교과서에도 일관성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하던대로하다 망하지만 한던대로 해야 일정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 또 바꾼다는 위험이 꼭 좋은 결과를 갖고 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집합A이라는 나에게 좀더 집중하려고 한다. 사실 집중해도 얘가 가만히 있는 날이 없다. 얘처럼 산만하고 변화무쌍한 녀석이 없다. 여유가 있으면 삽만한 숟가락을 오작교 삼아 집합B에게도 걸치고 그러다보면 여집합에 대해서도 좀더 이해가 생기지 않을까 한다. 오늘 너무 많이 야매를 가동한 듯 하다. 머리아프다.


#야매 #공상 #관점 #잡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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