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삶의 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Chernobyl (★★★★★)
지난주부터 좌전(左傳)을 읽기 시작했다. 심천 출장, 고객 미팅, 오늘은 엄니랑 우기기 경쟁을 하면서 친척을 보고 왔다. 바쁜 나날이 피곤하다. 월요일에도 미팅이 있고, 하는 일도 미중 전쟁의 여파 속에서 골치 아픈 구석들이 자꾸 생긴다. 그런데 마나님이 사준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chernobyl을 본다. 그런 모습이 우스꽝스럽고, 졸다보다를 반복하며 끝까지 보고 있는 내가 한심하거나 기특하거나 그렇다.
포털에 올라온 기사를 읽고 세상의 천차만별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용납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알겠다. 체르노빌을 보며 순수하게 진실에 다가서는 과학자, 그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불편함을 위해서 거짓을 선택하는 인간, 진실은 그럼에도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내레이션이 깊이 다가온다. 리영희의 영상과 대화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진실이란 주제는 영역은 다르지만 같다. 좌전(左傳)의 명문장을 뽑아낸 책의 시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실의 주변에 인간이 추구하는 정의, 사랑, 평등, 자유가 이어질 때 가치가 생긴다.
미분이란 거짓말 수학은 인간이 이루지 못한 바벨탑에 대한 유혹 또는 도전을 갖게 한다. 하지만 0에 가까운 것과 0은 다르다. 그것이 진실이다. 체르노빌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또 다른 유형의 완벽을 추구하는 것 같다. 완벽과 완벽에 가까운 것 사이에 존재하는 이익, 비용이란 거짓의 대가는 사람들의 안전이다. 그 안전을 허물어 60만 명이 투입되고 10만 가까이 생명을 달리했다.
인간을 평가할 때 0이란 없다. 완벽의 의미로 이야기하는 100도 사람에겐 다다를 수 없는 곳이다. 마치 유와 무가 한 곳에서 나와 상생하지만, 인간은 그 사이에서만 살아간다. 완벽은 신의 영역이고, 완벽하는 인간의 진실한 노력이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참 다사다난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체르노빌도 기억나고, 후쿠시마도 기억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체르노빌은 사건의 존재만 알고 있었다. 후쿠시마 사태는 더 많은 기억을 갖고 있다. Ikegami 본사에 보낸 검토용 견본 건으로 통화를 하려고 하던 날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속보가 나왔다. 퇴근시간이 다돼가는 시각 CNN을 통해서 바라보는 영화와 같은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하나는 안일한 인간의 태도가 재난을 부르고, 다른 하나는 자연재해에 인간의 우유부단함이 일을 더 키웠다. 사건의 구성은 동일하고, 거짓을 일삼는 인간의 태도도 동일하다.
원전은 매력적인 존재다.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익 때문에 사람들을 안전하지 못한 세상에 방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성을 만들고, 국가와 제도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궁극적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익을 위해서 인신매매를 허용할 수 없듯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배려하는 사회가 되어가길 바란다. 광부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군말 없이 나서는 것도 이익 때문이 아니다. 그래야 한다는 믿음, 그 믿음의 대상 또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보리스, 레가조프, 울라나를 되새겨보면 지식인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순수, 거짓의 갈등도 있지만 비겁함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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