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이 Feb 14. 2018

위로하는 정신

삶과 자신을 사랑하는 지혜를 나의 집사에게

 요즘 매우 한가해졌다. 드디어 재취업에 성공한 집사가 몇 주 전부터 출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종일 내 옆에 달라 붙어서 귀찮게 하던 이가 없으니 어찌나 여유로운지! 잠자는 내 얼굴을 시시때때로 들여다보는 이가 없으니 낮잠도 꿀맛 같다. 한갓지게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행복이 참 별 거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꿀잠단지에 빠지기 일보직전..!

 그런데 마냥 행복을 누릴 수도 없다. 집사가 마음에 걸린다. 일은 잘 하고 있으려나. 요즘 집사가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새로 만나게 된 동료들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다들 업무적으로도 배울 점이 있는 데 다가 친절하다며, 집사는 새로운 동료들에 대해서 칭찬만 늘어놓았다. 대신 그녀 자신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그들에 비해 자신은 크게 뛰어난 점 하나 없이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잔뜩 주눅 든 소리를 늘어 놓았다. 그리고 다시 직장인이 되고 보니 자신이 '그저 그런 인간'이라는 게 실감난다고도 말했다.

 

 밥벌이의 거룩함이나 일할 기회의 소중함을 들며 집사를 따끔하게 꾸짖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집사가 그걸 몰라서 퇴근 후 저녁마다 서글프고 공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혜.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인식하고 어떤 상황에 자신이 처해있는지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가운데에서도 자기 자신임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데 필요한 지혜 말이다. 자신감이나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라는 충고와 같은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집사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러한 사정으로 오랜만에 읽게 된 책은 '작가들의 작가'로 꼽히는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의 <위로하는 정신>(안인희 역, 유유, 2012)이다. 원제인 <몽테뉴(Montaigne)>가 말해주듯 이 책은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의 전기다.  전기가 츠바이크의 장기로 꼽히는 이유를 알 만 했다. 인물의 생애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열하는 일반적인 전기와는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구체적인 일화들을 엮어낸 것도 아닌데 재미있었다. 역사적 인물의 생애에 대한 설명 보다는 츠바이크 본인이 잘 아는 친구에 대한 묘사라는 인상이 강했다. 게다가 유려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문장까지. 첫 인상이 매우 좋은 작가였다.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2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츠바이크는 나치즘의 광기를 피해 브라질로 도망쳤다고 한다. <위로하는 정신>은 츠바이크가 브라질에서 아내 샬롯데와 자살하기 전에 쓴 글이라고 한다. 전체주의가 온 세상에 패악을 부리면서 몸, 마음, 정신 모두 궁지에 몰린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츠바이크는 "삶과 자신을 사랑하는 본능적인 지혜(p. 71)"를 가지고, "'자신을 지킨다는 가장 높은 기술'(p. 33)"에 자신의 삶을 바쳤던 몽테뉴의 전기를 쓰게 되었던 것이리라.


 그런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로 당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던 것인지는 차마 헤아릴 수도 없다. 다만 미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츠바이크 자신은 미치지 않으며,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얻고 위안을 구하고자 몽테뉴의 글을 읽고 그에 대한 글까지 쓰게 되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자신을 지킨다는 가장 높은 기술"


 츠바이크에 따르면 몽테뉴는 부, 명예, 권력은 물론이고 지식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신 몽테뉴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 그리고 자아와의 교감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그 가치를 실현하는 데 매진했다. 그리고 몽테뉴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었다. <위로하는 정신> 속 츠바이크의 문장을 빌어 표현한다면,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p. 115)을 몽테뉴는 해낸 것이다.  


말할 때나 행동할 때에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도록 어떻게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 어떻게 나의 본래의 영혼과 오직 내게만 속한 물질인 내 몸, 내 건강, 내 신경, 내 생각, 내 느낌을 지킬 수 있을까? (...) 우리가 예술가인 그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존경한다면, 그 까닭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삶의 최고 기술을 위해 자신을 바쳤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킨다는 가장 높은 기술'에 말이다. (pp. 32-33)
몽테뉴의 모든 작품에서 나는 오직 하나의 형식과 하나의 경직된 주장만을 발견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외적인 지위나 혈통이나 재능 등의 이점이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지키고 자신의 삶을 사는 정도에 따라 고귀한 인간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 예술 중에서도 최고 예술은 자기 보존의 예술이다. (p. 115)


 나는 바로 이게 우리 집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 내면의 소리가 외부 세상의 소리에 묻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대부분의 경우에 자기 마음의 소리를 지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어떤 순간에 행복하고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해서 괴로워했다. 가만히 자기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싶다가도 이내 주변의 소리에 갈대처럼 흔들렸다. 얼마나 많이 가졌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부하로 부리고, 얼마나 많이 아는지가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얼마나 오롯하게 지켜냈는지에 따라 고귀한 인간이 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물론 집사 역시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아는 대로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니 문제였다. 그 '자신을 지킨다는 기술'을 몽테뉴에게 어서 전수 받아서 집사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몽테뉴가 세상을 멀리하면서 탐구하였던 자아의 내용에는 무엇이 있으며, 그가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된 자아를 지키는 기술이 어떤 것인지 츠바이크는 알려주지 않는다. 답답했다. 내가 이 책을 읽고서 집사에게 건네주고 싶었던 위로는 결국 어떻게 하면 그 위대한 기술을 가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뒤에 가면 내가 원하는 내용이 나오나 싶어서 참고 읽었다. 그러나 역시나 답은 없었다. 나도 우리 집사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아는 경험을 하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기술을 가지도록 돕고 싶다. 물론 나는 이미 실천하고 있지만 우리 고양이 세계는 닝겐계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니까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츠바이크와 몽테뉴의 지혜를 빌려보고자 했던 것인데, 보기 좋게 배신 당했다. 가벼운 분량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엄청나게 억울할 뻔 했다. 아니다, 그래도 억울했다.



오직 당신에게만 속하기에.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집사의 삶에 바로 적용가능한 지혜를 <위로하는 정신>에서 얻을 수 없다. 다른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몽테뉴의 답은 몽테뉴만의 것이고, 몽테뉴를 통해서 츠바이크가 얻게 된 답 - 모르겠다. 그가 답을 얻었을까? 답을 얻었다면 그렇게 자살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끝없는 고난을 스스로 종료하는 것이 그의 답이었을까? - 도 츠바이크만의 것이니 나의 집사에게는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집사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집사 자신 뿐이니다. 아, 이 얼마나 진부한 말인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뿐이다. 그리고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본인의 행복이 아니라 남의 행복만 좇다 죽는 닝겐들이 태반일 텐데.  


Stefan Zweig, 1881-1942

 

  츠바이크는 자기만의 답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20세기에 츠바이크를 탄식케 했던 것은 자기도 모를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자아를 부정하는 세계였다. 지금 21세기를 사는 집사의 상황은 반대다. 표면적으로는 누구도 집사의 삶에 억압을 가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함과 자유의 무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본인의 굳은 의지와 세계가 충돌하던 20세기 초의 츠바이크가 쓴, 의지와 세계가 충돌하는 가운데서도 기어이 의지를 꺾지 않고 자신을 지켜낸 16세기의 몽테뉴의 삶이 21세기에 읽히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렇게 진부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을 부디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당신 자신을 아는 이는 오롯이 당신 뿐이다. 그 방법에 왕도는 없다. 서로 다른 우주와 숨결과 리듬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의 이 진부한 독후감을 집사도 용서해주리라 믿는다.


 대신 츠바이크가 몽테뉴의 전기를 통해서 독자들과 광기 어린 20세기 초 세상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저 자기가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인간 개인의 몫이자 개개인이 혼자 나서서 온 삶을 걸고 싸워야 얻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 개인을 둘러싼 공동체나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개체들의 진정한 행복을 방해하지 않는 문화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일 뿐이다. 개개인이 자아와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상이할 수밖에 없으므로 츠바이크는 몽테뉴가 그의 삶에서 발견한 '내용'보다는 그가 평생 취한 삶의 '형식' 혹은 '태도'에 대해서만 기술한 것이다. 츠바이크는 아래처럼 믿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상의 모든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다. (pp. 120-121)


 따라서 나는 집사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조언하지는 못하지만, 다만 이 말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이의 행복에도 다정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네가 행복해지는 길이 조금은 편안해질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