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무채색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집사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
자랑 같아서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집사는 성격이 나쁘지 않다. 누구에게도 웬만해서 화를 내지 않으며 감정 기복도 적어서 늘 안정적인 심리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일 없이 일상을 잘 관리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다. 그러니 나를 위한 봉사를 시작한 지 4년 차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집사의 서비스는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좀 놀아주다가 갑자기 귀찮아져서 발톱을 세워 할퀴는 때를 제외하면 화를 낸 적도 없다. 본인이 아둥바둥 애쓰면서 참는 게 아니라 원래 타고난 성격이 그렇게 편안한 편인 것 같다.
주인인 내가 보기에 집사로서 나쁘지 않은 성격이다. 하지만 집사 본인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이 개성이 없는 인간이라고 고민해왔다. 뚜렷하게 싫어하는 게 없어서 세상과 불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딱히 원하는 게 없기 때문에 세상을 깊이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집사는 자신이 뜨뜻미지근하고 무채색의 사람이라 비단 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가 희미할 것이라는 예감에 종종 시달렸다. 이렇게 고요한 마음으로 살고 있자니 시간과 인생이 흔적도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고 타고난 마음의 구조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집사는 자주 괴로워했다.
괴로워하는 집사 앞에 그녀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닝겐 혹은 유사 닝겐이라도 데려다주고 싶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나 해>가 제격이었다. 개성이 또렷한 네 친구들과 달리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은 특색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늘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자키 쓰쿠루 본인이 생각하는 자아상 역시 몰래 엿본 집사의 일기장 속 내용과 비슷했다.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부족함 없이 누리며 살았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괴로워한 경험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말로 원하는 것을 고생해서 손에 넣는 기쁨을 맛본 적도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없었다. (276쪽)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쓰쿠루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애당초 텅 비었던 것이 다시 텅 빌 따름이 아닌가. 누구에게 불평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와 그가 얼마나 텅 빈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다 확인한 다음에는 어딘가로 가 버린다. 그다음에는 텅 빈, 또는 더욱더 텅 비어 버린 다자키 쓰쿠루가 다시금 혼자 남는다. 그뿐이지 않은가. (289-290쪽)
다자키 쓰쿠루는 집사가 공감을 나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콤플렉스를 조금씩 극복해나가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그녀에게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를 추천해주고 싶다. 전에 없이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된 여인 사라를 만나고 그녀의 조언에 따라 오래 전 영문도 모른 채 절교를 당했던 옛 친구들과 재회하면서 다자키 쓰쿠루는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순례")를 갖게 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분명하게 밝혀지는 것도, 다자키 쓰쿠루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자존감을 북돋아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이 그저 개성 없는 사람으로써 주어진 대로 살아온 게 아니라 나름대로 자기만의 선택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도드라진 색깔은 없지만 형태를 만드는 일(다자키 쓰쿠루는 흔히 말하는 '역덕'이고, 실제로 역을 건설하고 관리하는 직업에 종사한다.)에만은 끌렸다. 찬란하게 튀어오르는 색깔이 없는 대신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살아왔다. 스스로는 텅 비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다른 색들을 넉넉하게 품어내왔다.
"아마 나한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선명한 색채도 없어 내가 내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게 오래전부터 내가 품어 온 문제였어. 난 언제나 나 자신을 텅 빈 그릇같이 느껴 왔어. 뭔가를 넣을 용기로서는 어느 정도 꼴을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내용이라 할 만한 게 별로 없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 사람한테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잘 알게 되면 될수록, 사라는 낙담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까."
(...)
"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가는 그릇으로." (380-381쪽)
우리 집사도 이 책을 읽고 더 이상 자신이 무채색이라서 희미한 사람이라고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집사 본인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의 색깔을 자기 삶에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타인에게 선하고 좋은 그릇이 되는 데 마음을 두고 살면 좋겠다. 그냥 그게 본인이니까 말이다. 물론 나는 집사가 어떤 색깔을 가졌건 색깔이 없건 언제까지나 사랑하겠지만, 집사 본인이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아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권한다. 올해는 집사가 자기 자신에게로 순례를 떠나는 해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