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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이 Mar 04. 2018

바깥은 여름

다시, 사월을 기다리는 집사에게

계절만큼 약속을 잘 지키는 이가 또 세상에 있을까? 계절은 곁으로 돌아오겠는 다정한 기약도, 멀리 떠나버리고야 말겠다는 모진 맹세도 모두 지킨다. 그리하여 다시, 또 다시 봄이 돌아왔다. 나와 집사의 생일이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올 봄은 집사와 함께 맞이하는 세 번째 봄이다. 추위를 많이 타는 집사의 움직임이 한결 가뿐해진 게 눈에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마냥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 번의 봄도 그랬다. 봄꽃을 따라 벙긋 웃지 못하는 것은, 우리 집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인 2014년 사월, 이 땅의 사람들의 마음에는 깊디 깊은 계곡이 생겼다고 한다. 304명을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잃어버린 날의 흔적이다. 참으로 참담한 하루였다고 집사는 기억한다. 그 계곡에는 통곡 소리가 밤낮으로 울려 퍼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계곡을 떠나거나 아예 메워 버리려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아직 제대로 울어보지도 못한 채 심장이 깊이깊이 패여만 가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는데 말이다.


(출처: https://blog.aladin.co.kr/pretty9121/popup/9535484)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은 2018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2014년 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들이 있다. 작가는 제목에 대해, 바깥이 어떤 계절이건 내내 눈 내리는 겨울인 스노우볼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들을 떠올리며 지은 것이라고 밝혔다. 봄날에 들이닥친 한겨울 같은 삶을 위로해 줄 수는 없어도 잊지는 않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는 집사에게 <바깥은 여름>을 권해주고자 한다.   




2016년 늦가을부터였다고 한다. 각자 생과 사의 영역에서 진도 앞 바다에 갇힌 사람들을 집사가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해 말 국정농단 사태와 더불어 제기된 '7시간의 행적'에 대한 관심에서 폭발했고, 집사는 자신이 그들을 어느새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피 맺힌 눈물들 오해 받고 조롱 당하는 것을 외면해왔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비록 김애란의 <입동> 속 '꽃매'를 직접 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방조해왔다는 것만으로도 그 참혹한 매질에 일조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내는 연주를 끝낸 뒤 수천 명의 기립 박수를 받은 피아니스트 마냥 울었다. 사람들이 던진 꽃에 싸인 채. 꽃에 파묻힌 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마냥 내가 붙들고 선 벽지 아래서 흐느꼈다. 미색 바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흰 꽃이 촘촘하게 찍힌 종이를 이고서였다. 그러자 그 꽃이 마치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진 조화처럼 보였다.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 김애란, <입동>, 36-37쪽




집사는 2014년 봄보다 2016년 늦가을이 더 괴로웠다고 한다. 2014년 당시에는 막연히 마음이 아팠다면, 나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인 2016년에는 소중한 사람을 눈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잃어야 했던 이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내 손으로 먹이고 기르고 쓰다듬던 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집사는 밥 먹는 나를 보면서 울었다. 울음이 그치는가 하면, 자신의 공감과 슬픔은 실제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게 미안하다며 집사는 다시 울기 시작다. 그리고 왜 인간은 끝내 자기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외롭고 무서운 일이다, 외로운 일이다, 하고 내 귀에 속삭였다. 집사의 스킨십을 3초 이상 버티지 못하는 나도 그런 날만은 몸을 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최대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오해는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춘 이들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제 마음대로 오해하지 않기, 알지 못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안다고 말하지 말기. 다만 가만히 헤아려 보려고 노력하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는 자기 상처에 파묻히지 않으며 기억하는 삶을 다짐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 이런 말씀 드리다니 너무 이기적이지요? 평생 감사드리는 건 당연한 말이고 평생 궁금해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때 권도경 선생님이 우리 지용이의 손을 잡아주신 마음에 대해. 그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날 뿐,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거든요. - 김애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264쪽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 김애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265-266쪽




그리고 집사에게 추가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조금 더 삶의 테두리를 넓혀보라는 것이다. 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집사 나름대로는) 더 깊이 타인에게 공감했던 것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여러 사랑과 슬픔을 가져야 곁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지하고 나설 용기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사월이 다가온다. 집사를 포함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사랑하고 더 슬퍼하고, 그리하여 함께 했으면 좋겠다.   

    

(출처: ggomsi_00님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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