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해 씨는 이래서 산으로 간다 004, 축령산

삶의 15%를 충전하는 방법

by 도도해

축령산은 전남 장성군의 북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북일면과 서삼면, 그리고 고창 은사리 경계까지 연결된 산이다. 50년이 넘은 편백과 삼나무로 유명하며 특히 편백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식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의도적으로 생산하는 물질로 살균 효과가 있다. 숲 길만 걸어도 피톤치드로 인한 산림치유 효과를 볼 수 있어 ‘치유의 숲’이라 부른다.


이 숲길을 조성한 사람은 춘원 임종국 선생이다. 그는 1956년부터 1976년까지 한국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을 가꾸기 위해 손수 사비를 털어 나무를 심고 가꿨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4월에 ‘20세기 대한민국 국토 녹화에 기여한 공로가 가장 큰 4인’으로 선정되었다. 이 좋은 곳을 바로 코앞에 두고도 갈 수 없었다. 그건 도시에 있는 산이라 아니라 장성의 외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모암 저수지 주차장 쪽에 핀 봄까치꽃>


몇 해 전에 장성으로 오자마자 산으로 달렸다. 딸들이 어릴 때 가족 나들이를 했던 추억을 따라 혼자 산을 오르려고 했었다. 광주 광산구에 있는 어등산처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인적이 드물고, 등산로가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오를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어등산으로 갔었다.


정상은 해발 621m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출발 지점이 해발 240m 정도 되기 때문에 오르는 길이 쉽다. 한 주에 두 번 가본 결과 추암 주차장(서삼면 추암리)에서 출발하여 치유의 숲 쪽으로 가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가장 짧고 쉬운 코스 같다. 모암 주차장(서삼면 모암리)에서 치유의 숲을 지나 정상으로 가는 길은 조금 더 긴 코스이다. 어느 쪽으로 가든 산을 오른다는 느낌보다는 산책을 하듯 편안하다. 왕복을 해도 3시간이 되지 않는다. 물론 코스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시간은 바뀌겠지만 3시간 정도면 충분히 정상도 오르고 그 일대를 돌아볼 수도 있다.

<치유의 숲이라 부르는 곳>
<피톤치드 가득한 숲의 모습>

산을 오르는데 자꾸만 휴대전화 배터리 양이 15% 남았다는 메시지가 떴다. 마음이 급했다. 이상하게 15% 밑으로 내려가면 배터리가 다른 때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닳아지는 느낌이다. 물론 경고 메시지가 떴을 때부터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해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때부터 나는 조바심을 내며 무조건 충전기를 꽂는다. 산속이라 충전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여기에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불안했다. 걸음이 엉켰다. 이곳은 잘 아는 곳이고, 조금만 가면 금방 하산할 수 있다며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조급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15%, 15%.


요즘 내 삶의 배터리도 15%이다. 자꾸만 충전해달라고 경고음을 보낸다. 경고음을 무시하고 일만 했더니 몸과 마음이 고장 났다. 불면증으로 인해 2주 내내 잠을 잘 수 없었다. 평소에도 새벽 3시에 잠들었다가 7시쯤 일어나니 많이 자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고민이 있거나 문제가 있다면 그것만 해결하면 되는데 그것도 아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는 좀비처럼 멍한 상태로 있다가 일을 했다. 10시쯤 퇴근하면 그때부터는 정신이 들었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몸에 무리가 오더니 일주일 전쯤에 머리를 감기 위해 고개를 숙였는데 허리 부근이 찌릿했다. 곧바로 이어지는 근육통. 잠도 오지 않았지만 눕는 것도, 일어서는 것도, 걷는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생채기가 났다.


그때 미리 약속해 두었던 모임이 생각났다. 몸이 불편하니 약속을 깨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에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사진작가와 운동을 열심히 하시며 여행 정보를 많이 주시는 분과의 약속이라 깰 수 없었다. 내가 몸이 불편하면 상대도 불편해질까 봐 이를 악물고 모임에 나갔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축령산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피톤치드를 흡입한 것처럼 맑은 기운이 솟아났다. 오래간만에 웃었고, 그 날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나는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에도 쉽게 무너진다. 만남으로 인해 시간과 감정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스스로 사람을 멀리했었다. 퇴근도 10시쯤 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는 아무도 만날 수 없다는 물리적 제약이 당당한 거절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만나자고 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사람만 만나다 보니 거의 사람과 단절하다시피 했었다.


모임이 없어지니 처음에는 보기 싫은 사람을 안 봐도 좋았다. ‘최소한’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도 많지 않아 내 일상은 학원, 집, 학원, 집의 아주 단순한 코스로 변해버렸다. 물론 그래도 몇 달에 한 번씩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사람에 대한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배터리 충전이야 충전기를 꽂으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삶의 85%를 어떻게 충전할지 고민했다.


일단 15%는 남아 있으니 나머지 30%는 내가 좋아하는 산을 다니거나 여행하는 것으로 채우고 싶다. 충전율 45%. 일도 하고 소설도 쓰고 있으니 30%쯤 더 충전할 수 있다. 충전율 75%. 아주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술도 마시고 모임 하는 것으로 10%를 채우면 충전율 85%가 된다. 아무리 이것저것 해도 15%가 부족했다.


산을 오르는 동안 15%를 어떻게 채울지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에서는 자꾸만 배터리 부족 경고음이 떴다. 누군가 카톡을 보냈기에 확인하고, 페북에 들어가는 순간 전원이 꺼져버렸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 안에서 뭔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더는 충전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가 없으니 의외로 편안했다.


휴대전화 없이 내려오다가 문득 나머지 15%는 내 안에 잠재된 근심과 불안, 욕망과 욕심으로부터 나를 버리는 일에 열중하기로 했다. 그동안 채우려고만 했지 비울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비우고 나면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이든 채우려고 하는 것들을 차단하면 될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버리는 것이 삶의 충전율을 15% 올리는 방법이자, 나를 치유하는 일인 것 같다.

<축령산 정상>



* 산에 대한 정보는 네이버를 참고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