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해 씨는 이래서 산으로 간다 006, 대덕산

길에서 '길'을 내다

by 도도해

“뻐스가 아직 안왔는가벼.”


10시 50분에 출발하는 배인데, 11시가 돼도 출발하지 않았다. 낯선 풍경에 답답했는데 노인들은 익숙한듯했다. 미리 배에 탔던 노인들은 지팡이를 옆자리에 내려놓고 운남장에서 산 꾸러미를 만지작거렸다. 밀린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 선착장 앞에서 택시를 타고 내렸다. 그 노인이 타자 배는 출발했다. 그러나 몇 미터 가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동을 켜놓고 또 누군가를 기다린 듯했다. 누구 하나 군소리가 없다. 초보 여행길은 나만 불편했다. 더는 올 사람이 없는지 그제야 출발했다.

<배에 오르는 주민들>


신안군에 있는 섬, 선도는 섬 모양이 매미를 닮았다고 해서 매미 ‘선’ 자를 써서 선도이다. 전남 무안군 운남면 신월리의 작은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되는데 철선과 도선(사람만 타는 쪽배/ 도선이란 말은 섬을 왔다 갔다 하는 배를 가리킨다)이 있다. 우리 일행은 도선을 탔는데, 정원이 8명이다. 배를 타고 10분쯤 가면 선착장이 나오는데 5개의 마을로 구성된 제법 큰 섬이었다.


선도에 있는 대덕산은 해발 143.4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다. 쉬지 않고 간다면 왕복 1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그런데 사람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산은 오를수록 길이 사라졌다. 풀 때문에 숲이 되어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어릴 적 산에서 산 적이 있어서 그 길이 무섭지 않았다. 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되돌아올 정도로 풀이 사람의 키만큼 자라 있었다. 칡넝쿨을 치우고 갈대 사이를 벌려 길을 냈더니 온몸에 땀이 났다. 비가 온 뒤라 습하기까지 했다. 뱀이 나오거나 벌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으나 다행히 아무 일 없이 길을 내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섬으로 가는 도선>

대덕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다른 등산로처럼 안 되어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섬에는 노인들만 살아서 길을 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산이 낮으므로 산악인들에게는 흥미가 있는 산이 아니다. 산을 타기 위해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지자체에서 길을 내준다면 좋겠지만 오를 사람도 없는 산에 누가 길을 낸단말인가.


길을 내면서 산을 오르는 건 처음이었다. 무모한 짓인데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정표가 있으니 길이 안 보인다고 해도, 길을 내고 걸어도 무조건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지난여름에 갔던 선도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하는데 마음이 허전하다. 그건 겨울 방학 내내 온 식구가 붙어 있었는데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아이들이 각자의 길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텅 빈 방을 보자 아이들이 갈 길도 선도에서처럼 각자의 길을 내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응원보다는 안쓰러움이 먼저 든다.

<정상에서 바라본 마을>


첫째는 간호대 4학년이기 때문에 취업 준비하느라 바쁘다. 대학교 기숙사에 있어서, 그것도 같은 과 친구랑 함께 있어서 불안이 덜하다. 둘째는 이제 대학생 새내기라서 걱정이 크다. 대학가 근처에 있는 원룸을 얻어줬다. 생활하는 데 불편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달려갈 거리에 있지만 혼자 지내야 하는 딸을 두고 오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급하게 얻은 원룸이라 그런지 둘째는 구시렁거렸다. 벽지가 마음에 안 든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댔다. 물론 건축학과에 가기 때문에 방의 구조나 벽지가 크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내가 우선으로 봤던 것은 번화가인지, 생활에 필요한 시설들이 잘되었는지, 방범은 잘 되는지이다. 보는 기준이 달라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 딸을 보며 우리 부부는 우리의 스무 살 청춘 때를 생각했다. 나는 시골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안산으로 취업을 나갔었다. 친구들이 대학에 갈 때 회사 기숙사에서 언니들과 지내며 업무에 필요한 것들을 배우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대학교에 가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었다. 누구 하나 도와줄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길을 정하고 움직였다. 그러다가 다시 안산으로 갔는데 집을 얻을 돈이 없어서 오빠네 집에 얹혀살았다.


방 하나에서 다 큰 남매가 살기 어려워서 오빠는 바로 근처 친구네로 옮겼다. 오빠네 집은 반지하 방이었는데 방 하나에 작은 부엌이 전부였다. 부엌이라고 하지만 싱크대 하나 없고 수도 하나를 두고 설거지와 빨래, 세면을 같이 해결해야 했다. 그것도 괜찮았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공동 화장실이었는데 늦은 시간에 화장실을 가기가 불편했다. 아니 무서웠다. 그래서 아침이 되도록 부푼 오줌보를 부여잡고 기다린 적도 있다. 여름이면 장마에 사방 벽면이 곰팡이가 피었던 것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가난을 곰팡이와 연결해서 생각할 때가 많다. 그건 그때 여름날 방안에 가득 피었던 곰팡이를 보고도 벗어날 수 없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오줌보를 붙잡고 날이 새도록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좌절하는 일밖에 할 수 없는 무능함이 곰팡이와 연결되면 아직도 스무 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내가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자식들에게 배부른 소리 하냐며 타박할 수 없다. 또 그렇게 살았다는 걸 아이들이 믿지도 않는다. 아이들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각자 어느 자리에 있든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거나 환경 때문에 힘들어서 살 수 없다면 돌아오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를 말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길로 갔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곳에서 열심히 살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남편에게 나도 길을 나서겠다고 말했다. 아이들 때문에 미뤘던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친구들이 대학을 가고 나는 취업을 했을 때부터 생각한 일이다. 만약 내가 대학에 간다면 나는 무조건 박사까지 마칠 거라고 다짐했었다. 친구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할 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에 갔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석사까지는 마쳤으나 늘 박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었다.


막상 길을 정하고 나니 두렵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방송대에 편입하고, 대학원 졸업 때까지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과 육아, 학업을 동시에 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학원을 운영하고 있어서 대학원 수업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을 거라 다짐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도 결정을 잘한 것인지, 내 길이 맞는 건지 수십 번 헷갈린다. 학비와 시간을 생각하면 포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심이 흔들릴까 봐 가족이나 친구에게 결심을 말했지만, 잘했다는 생각보다는 괜히 헛소리를 한 기분이다. 하지만 대덕산에서 길을 내고 길을 걸었듯이 내게는 소설이라는 이정표가 있으니 조금은 늦더라도 오르지 않을까. 자꾸만 흔들리는 내가, 내게 길을 잘 찾았으니 이제 그 길로만 가면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대덕산 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