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전데요. 1층으로 잠깐 내려와 주실래요? 저랑 데이트해요."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생생은 모르는 발신번호로 어떠한 전화가 와도 무조건 다 받는다. 오랫동안 영업에 몸담고 있는 비즈니스맨으로서 체득화된 습관이다. 070, 080 이든 발신번호가 없는 전화든 다 받아본다. 어느 한통의 전화에서
큰 비즈니스 딜의 작은 불씨가 시작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발신자의 첫 음성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굳이 영업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전화인가 아닌가는 발신자의 첫인사와 첫 문장만 들어도 대충 알 수 있다.
그런데... 데이트라니. 무려 수백만 년만에 들어본 희귀종 단어. 그 자체다. 기억에도 지워진 그 단어.
잘 못 들었나 했다.
첫 문장의 달달한 통화는 어제 아침일이다.
"네? 저... 전화를 잘 못 거신듯합니다."
데이트라니. 얼토당토 가당치도 않은 단어다.
"아이고. 선생님. 저 야쿠르트 아줌마예요. 매일매일 뵙고 인사도 드리고 그러는데 제 목소리 모르시는 거예요? 서운합니다요."
"아이코. 이런이런... 아니 근데, 사무실로 올라오시지 않고 어쩐 일로..."
당황한 생생은, 매일같이 2층 사무실로 야채주스 2개 (사장님용 1개, 재무실장님용 1개)와 윌 1개 (생생꺼)를 배달해 주시는 여사님께서 웬일이실까 의아해한다.
"데이트 하자니까요. 1층으로 잠깐 내려와 주세요~"
또 데이트란 단어가 생생의 메마른 가슴을 괜스레 쿵쾅쿵쾅 때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알겠습니다."
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쿵쾅쿵쾅 거리는 심장을 부둥켜안고, 쿵쾅쿵쾅 철계단을 내려간다.
순간에 든 생각은 이러하다.
'하. 여인 한분이 어쩌다 또 이 생생의 매력에 퐁당 빠지셨구만. 이를 어쩌면 좋노'
공장 초입에서 눈빛 또랑또랑한 여인이 다가온다. 야쿠르트빛 제복을 갖추고 멋진 아웃도어 헬멧을 장착하였으며 4륜 구동 '코코' 전동차를 타고 허리 쫙 펴고 오시는 그분이다. 야쿠르트 여사님 이시다.
"하 참. 데이트하자면 빨리빨리 내려오셔야지 뭐 이리 동작이 굼뜬가요?"
예전 같으면 벌써 얼굴 빨개져서 아무 말 못 하고 있을 테지만, 요즘의 생생은 예전의 수줍은 생생이 아니다.
글쓰기 하면서 다소 뻔뻔해진 생생은 "아니, 데이트 신청을 이렇게 박력 있게 하시면 고맙지 말입니다."
너스레를 떤다.
"꺄르르 꺄르르.......
그런데 선생님, 이번 달 결재금액이 계좌 잔액부족으로 처리가 안 되었어요. 오늘 중으로 계좌이체를 하시던가, 다음 달에 두 달 치를 한꺼번에 계산하시던가 하면 됩니다."
매월 윌 비용을 자동이체 걸어두었는데, 그 계좌 텅텅인가보다. 자주 확인을 안 하다 보니...
그럼 그렇지. 데이트는 무슨...예상은 했다만, 갑자기 뻘쭘 + 민망 + 부끄 3종 세트의 마음이 쓰나미로 밀려오자 생생은 괜히 목이 메이고 기침도 난다. "콜록"
여사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직원들 다 있는 사무실에서 이런 말씀드리면 선생님께서 창피하시거나 민망하실 듯해서 내려오시라 한 거예요."
생생은 여사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를 드려야 할지 어째야 할지 헤매면서 계속 기침만 해댄다. "콜록. 콜록"
그러니 고개만 꾸벅꾸벅인다.
"호호호. 선생님 사레 들리셨나 보다. 데이트 끝! 안녕 ~"
'하. 이 무슨 뻘쭐함이냐. 이 무슨 김칫국 한 사발 드링킹이냐...'
생생은 여사님이 한 손에 쥐어준 (야채주스 2개 + 윌 1개가 들어간) 반투명 하얀 비닐 봉다리를 하릴없이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서있다. 아. 이러는거 아니다. 정말.
여사님은 코코에 시동을 걸고 한 손을 높이 흔들며 한마디 더 하신다. "데이트가 너무 짧았죠? 선생님이 데이트 신청하시면 혹시 알아요? 제가 받아줄지? 호호호. 꺄르르 꺄르르"
생생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애매한 표정을 하며
뭐라 한마디 하려 하지만 나오는 소리는
"켁켁. 콜록콜록"이다.
슬쩍 열이 오른다. 몸살도 도진다.
데이트란 단어 자체에 따라온 수백만 년만의 설레임이냐
본인의 얼빵함에 스스로 괜히 화딱지가 난 거냐
요즘 유행이라는 독감인 거냐
아니면 그 지긋지긋한 코로나. 정녕 그 녀석인 거냐.
정신 차려라. 인간아.
병원에나 가봐라. 켁켁 콜록거리지만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