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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Feb 24. 2023

알바와 세상물정 (1)

정초부터 사장님의 따님이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한다.

사장님은 60대 중반이고 따님은 30대 초반이다. 후계 계승을 위한 본격적인 경영수업의 시작을 의미한다.

따님이 생산라인을 둘러보려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사장님이 깊은 한숨을 쉬며 "서른이 넘도록 그저 공부만 해온 아이라 이래저래 걱정이 많아요. 여태 그 흔한 알바 한번 안 하고 자라왔으니 세상물정도 모르는데 회사일을 잘 해낼지 걱정입니다. 잘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한다.


따님은 요즘말로 금수저다.




따님에게 뭘 어떻게 가르쳐야 될지 고민에 앞서,

알바라... 알바의 추억과 회한이 먼저 전두엽을 강타한다.


살아오면서 대략 50~60 여 가지의 알바를 경험하였다. 더 많을 듯한데 세세한 기억은 이제 가물하다.

고딩시절 동네 식품점에서의 산마루 달동네 쌀 배달부로 부터 시작해서, 현 직장 입사 직전의 병원주차관리원까지 실로 다양하고 파란만장 대환장 알바의 추억이 주르륵 밀려온다. 10대에서 50대로 걸쳐 알바의 역사는 흘러왔지만 50대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내 인생의 겨울. 그 시리도록 저린 계절이다.


나는 알바의 치열한 역사 속에서 어떤 세상물정을 배워 왔으며 어떤 경험치를 쌓아 왔는지 현장감 있게 분석하고 정리함도 의미가 있겠다. 그 의미는 과거의 고난이나 역경을 자랑스레 되짚어 보자는 라떼호스의 의미보다는 작은 일에서도 배우고 깨우치는 바가 있었다면, 복기하여 기록하고 오늘 이 시간에도 현장에서 분투하고 있는

8백만 알바생들에게 나눠봄의 가치로서 그 의미를 부여해 본다. (8백만이라는 수치는 정확지 않다. 천만은 너무 많아 보이고 5백만은 적어 보이니 8백만이 적당스럽다. 그냥 내 생각이다. 그러니 탈모인도 8백만, 산책러도 8백만... 이런 식이다.)


너무 오래전 역사는 기억이 가물하니 최근 10년 내 범위로 좁혀서 추려보는데,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해온

알바부터 출발해 본다. 1577-1577 앞뒤가 똑같은 대리운전이다.




이수근인지 김병만인지를 홍보모델로 광고하던 대리운전회사는 전국구 규모를 자랑하듯 서울 강남 교보문고

사거리에 본사를 두고 있다. 여차저차 본업 외 부수입을 찾던 생생은 이왕 할 거면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보자라는 당찬 포부와 함께 그 첫날을 시작한다. 첫날 첫차는 듣도 보도 못한 외제차. 수많은 버튼과 작동스위치에 멘붕에 빠진다. 출발조차 하지 못하는 대리기사에게 쏟아지는 건 참기름에서 방금 건져 올린 듯하게 생긴

차주의 찰진 욕설뿐. 진땀 가득 운행을 마친 후에 돌아오는 건 본사로부터의 계약해지 메시지.

다음날부터는 그 당시 살고 있던 동네. 경기도 OO시의 어느 허름한 대리운전 회사에서 출발을 다시 시작하였고,  근 4년을 냅다 달렸다.


Ep 1.

식당 앞에 두대의 차가 서있다. 앞차에는 이미 대리기사가 와서 차주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내 담당인 뒤차

근처에서 차주에게 연락을 취하는 사이, 앞차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돌리니 앞차의 차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손을 붙들고 있고 유혈이 낭자하다. 재빨리 뛰어가 보니,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차문에 손가락이 끼었고 일 부분이 잘린 섬뜩한 순간이다. 앞차의 대리기사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고만 있다. 기사는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다. 생생은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이머전시 상황이다.


청년은 새파랗게 떨고 있으니 즉각 대처가 가능치 않겠다. 생생은 급히 잘린 부위를 집어 들고 식당 안에서

비닐봉지와 얼음팩을 얻어, 잘린 부위를 봉지에 넣고 청년과 아주머니를 태우고는 근처 병원으로 냅다 달린다. 응급실에 아주머니가 들어가는 장면을 뒤로하고 청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무 놀랬군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힘내요."  

병원을 나서면서 걷는 생생의 손발이 그제서야 후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나중에 식당사장님께 들은 전언에 의하면 봉합수술을 잘 되었고, 아주머니께서 생생에게 감사의 사례를 하겠다고 수소문하고 계신단다. 생생은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익명의 대리기사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 알게 된 세상물정 : 안전한 운전은 운행 시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차 문을 열고 닫는 때도 조심하라. 사고는 그 무심한 시간에도 온다. 일도 사랑도 그러하겠지.


Ep 2.

어느 비 오고 폭풍 몰아치는 여름밤이다. 그날의 차주는 거대조폭의 오야붕정도는 아니고 동네 양아치 그룹의 No.3 정도 되는 중간보스로 보인다. 팔에 그린 용꼬리가 대략 짐작케 한다.

생생은 고속도로 교차로에서 흐린 시야에 그만 진입로를 잘 못 들어선다.

뒷자리에 앉은 중간보스가 생생의 뒤통수를 계속 툭툭 친다. "이 아저씨가 지금 장난해?"

"그럴 리가요. 사장님, 빗길에 잠시 혼선이 있었습니다." 중간보스는 어디 어디로 전화한다.

"얘들아. 여기 이상한 아저씨가 날 엿 먹이려는구나. 모두 내 집 앞으로 집합해. 지금 당장! 이 아저씨 손 좀 봐줘야 쓰것다."


도착하기 10여분 동안 생생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했고 세상 듣도보도 못한 욕지거리를 감내해야 했다. 도착 후, 차문을 열자마자 요금도 받지 않고 냅다 달린다.

요금이 문제가 아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꼬봉들이 쫓아오지만 생생을 따라잡을 순 없다.

이래 봬도 생생은 평생 동안 어떠한 달리기 시합에서 져본 적이 없는 호쾌 준족이다.


* 알게 된 세상물정 : 살아가면서 폭우와 조폭을 함께 대하는 일은 피하라. 눈이 튀어나오거나 동네 야산에 파묻힐 수도 있다.


Ep3.

어느 시린 겨울밤, 콜이 없는 시간은 길어만 가고 온몸이 얼어온다. 겨우 잡은 콜은 어느 오리구이 장작구이 집이다. 남자과 그의 아내, 고딩 또는 대딩으로 보이는 아이들. 단란한 가족이 차에 오른다.

차에 오르기 전부터 남자의 시선이 자꾸 신경 쓰인다. 차 안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한껏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에도 남자는 말이 없다. 남자의 집에 도착하자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들여보낸 후, 남자는 말한다.

"생생아. 너. 네가 왜 이런 일을... 나. OOO 이야. 나 모르겠니?" 고개를 들고 자세히 보니, 고딩때 단짝

친구다. 절친했던 동창이다. "아... 기억나지, 너를 어떻게 몰라보겠냐." 친구의 말이 이어진다.

"아니. 대기업, 외국계기업에서 잘 나간다는 네 소문을 들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생생은 잠시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다시 고개를 들고 당당히 말한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해야만 하는 시절이 있단다. 우린 가장이잖냐. 아무튼, 건강히 잘 살아라."

친구가 추가로 쥐어주는 3만 원은 받지 않았다. "네 마음만 받을게. 고맙다."

동창과의 우연한 만남은 다시 긴 헤어짐의 시간으로 접어든다.


* 알게 된 세상물정 : 차주로 동창을 만나게 되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약주가 좀 과하신 듯 합니다. 사람 잘 못 보셨네요. 저는 생생이 아닙니다" 하거나,

"반갑다. 친구야. 우리 어디 가서 이슬 한잔 하자!" 호쾌하게 한잔하거나,

위 사례처럼 쿨하게 말하고 뒤돌아 집에 와서 이불킥을 냅다 하면 된다.

정답은 없다. 각자의 MBTI에 맞게 선택하면 큰 무리가 없다.




당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들의 각각의 시퀀스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날 어둠의 색깔, 축축한 습도 그리고 멀리 떠 있던 슬픈 조각달 모두.


하지만, 대리운전을 하면서 정작 나에게 깊고 다채로운 세상물정을 알려 준 건,

소시민들, 그 흔하디 흔한 서민들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평범하고 착하지만 취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다. 모두의 애환이다.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 깊이 묻어 둔 눈물 빛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다.

어쩌면,

생면 부지의 대리운전기사가, 뒷얘기 안 돌아다닐 듯 입 무거워 보이는 과묵 아저씨가,

그 들에게는 오히려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에는 최적인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술기운을 빌어서 말이다.


수많은 사연들, 천일 야화로 다루어도 못다 할 이야기들.

운행이 끝나도 내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 쏟던 청년들, 중년들... 사람들.

눈물의 밤, 힘겨운 계절. 그들 모두는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나만 겨울이 아니었다.

한줄 요약 : 알바는 사람을 철들게 한다.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가볍지않은 세상물정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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