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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Mar 01. 2023

쓰다보니 눈치챈 것들

공원에서 찾고 문장속에서 선택한 나의 자유

사랑에 빠졌다. 늘그막에 이 무슨 주책이람.

회사일도 손에 안 잡히고 밤에 잠도 안 오고 삼백육십오일 사시사철 오로지 그녀 생각뿐이다.

마음은 붕붕 뜨고 호흡은 불안하다. 과하게 뜨거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거나, 서릿발같이 차가운 불꽃에

애면글면하다가도 화딱지도 내고 신경질도 부리거나 통사정도 해본다. 그러다 한순간에 그녀가 토라지기라도 하면 전전긍긍 마음은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고, 8차선 고속도로가 아니라고들 말한다. 사랑은 함께 오르내리는 굽이굽이 오솔길, 첩첩산중 고갯길임을 암시한다. 그러하니, 내 마음 몰라준다고 끝없이 타박하고 질책하고 째려보거나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고 거리를 두고 서로를 찬찬히 바라봐야 한다.  억지로 끌고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는 법. 하늘로 쏘아진 서로의 마음이 차분히 안정된 궤도에 진입하는 때. 힘을 뺀 그 시간은 오히려 산뜻하니 가볍지만, 이끌고 나누는 힘은 의외로 세다.

숙성하는 시간의 힘이다.


물끄러미 그녀를 아니, 그녀들을 쳐다본다.

.

.

.

서랍 속에 먼지처럼 쌓여있는 미완성 글들이다.

울며 불며 쓴 글, 아프거나 슬픈 글, 쓰다만 게으른 글, 써서는 안 된다 생각한 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 망설인 글들이다. 언젠가 서로 손을 맞잡고 완생의 순간, 궤도의 시간을 맞이하리라 생각하면서도 지금은 괴롭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사랑은 어렵다.

밀당도 하루이틀이지, 어쩔 것이냐 이 대책 없는 사랑을.




서랍 속에 쌓아놓은 글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알게 되었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글 쓰는 일이 이다지도 애정 절절한 일인가... 너무도 좋은데 너무도 어렵다. 문득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어떠한 문학의 장르를 막론하고, 작가들이 또는 작가지망생들이 또는 그냥 쓰는 자 모두가 주야장천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이 이 아픈 사랑에 왜 속절없이 퐁당퐁당 빠지는 건가?

수많거나 셀 수 없는 대작가들의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니 "나를 찾기 위해서"라는 답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맞는 말씀 지당하신 말씀이다. 흘러가는 세월과 일상에서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일.

나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가는 일. 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이 글을 쓰는 나도, 그 과정 속에 있으니 얼추

그 의미와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듯한 느낌이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다시 질문이 올라온다.

'나를 찾으면 그다음은 뭐지?'

'나를 찾았다. 이야호. 반갑다. 나야. 너였구나. 그랬구나.' 하며 악수 척척, 인사 꾸벅하고는. 끝인가?

글 쓰는 이유의 종착역인가? 쓰기의 목적지인가?

"나를 찾아 위해서" + 알파가 있을 텐데. 그 + 알파는 무엇일까?"

사랑타령만 할게 아니라, 사뭇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1년여간 글을 써오면서 줄 곧 생각해 온 문제이다만 단정하여 답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다. 모든 작가님들의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으나 나만의 이유를 찾아보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쓰기 시작한 날들. 그 시린 겨울에 프롤로그에 썼던 마음은 이렇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매사 의욕을 상실한 진공의 시공간에서, 그 표류하는 바다에서 걸으며 쓰는 글은 하나의 나침판이 되어주고 지친 자의 삶을 토닥이며 바라봐 주는 친구가 됩니다. 글쓰기를 통해 소소한 일상을 반짝이는 순간으로 이끌며, 긴 터널에서도 별을 바라보게 됩니다.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행위로써의 글쓰기는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리지만 약하지 않은 몸짓이고 춤사위입니다. 지친 자, 넘어진 자 누구나가 그런 각자의 나침판과 친구가 되어줄 어떤 무언가가 있겠으나 글쓰기의 효능은 사뭇 주체적인 방향으로 그 길을 안내합니다.      

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상실한 건 그간 이룬 모든 것이 아니라 정작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모든 것이 있었지만 그 전체의 중심인 선명한 우주. 반짝이는 눈동자. 내가 빠진 삶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세계, 진공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문장공부 (#책과 강연 #전유정작가)를 하면서 적어본 '쓰는 이유'에 대한 생각도 유사하다.

냉정한 세상에 꺾이고, 무정한 사랑이 떠나간 이후로는 관심이 없었다. 세상에게도 사랑에게도. 일상은 무기력이 이끌고 무의미가 뒤따르니 흐르는 건 오직 허름한 시간뿐. 고장 난 나의 시계는 오래도록 멈춰 있었다. 어느 깊은 새벽, 시계가 멈춤을 멈추고 다시 뛰기 시작한다. 느리지만 또렷이.
작은 노트에 내 마음을 조금씩 옮기면서부터다.

쓰면서 눈치챈 것은, 모든 관심과 사랑의 출발점은 바깥세상도 어느 타인도 아닌 내 마음의 깊은 우물이라는 점이다. 밖에서 안으로 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다. 방향을 착각하고 길을 잃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짧은 한 문장은 한 줌의 마중물이 되어 깊이 잠든 우물에 파도를 일으키고 바다의 의미가 되며, 그 의미는 한걸음 한걸음 회복과 전진을 이끈다.

나로부터의 사랑과 관심으로 쓰는 보통의 일상은 문장의 힘을 키우고, 용기는 문장대로 사는 삶을 이끈다. 용기 있는 자가 의미 있는 시간도 새로운 행복도 얻는 거겠지. 매일 문장공부를 하고 쓰려는 이유다. 이제 겨우다시 뛰는 시간을 나만의 속도와 리듬에 맞추고 용기 있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끝날 때까지는 정녕 끝난 게 아니니.


결국,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라는 짧은 답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처럼 짧지만 깊고 강렬하며 무궁무진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다시 알아챈다.

쓰는 일은 나로부터의 회복과 치유, 다시 일어서는 용기이며 인생항해의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다.


내면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이끄는 동서고금의 문장들이 있다.

헤아릴 수없이,수많은 작가와 더 많은 고언 중에 가장 좋아하는 말은 보르헤스의 명언이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꿔본다.

"우리는 문장을 쓰지만 그 문장을 살아낸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정혜윤 작가가 <아무튼, 메모>에서 인용한 보르헤스의 문장이다.
출처 : 마음건강 길(https://www.mindgil.com)
나를 찾아서가 끝이 아니라, 결국은 내가 읽고 써온 문장대로 살아가라는 보르헤스의 선명한 나침판처럼, 읽고 쓰는 과정은 나를 찾는 과정 자체이며 궁극의 결과로서 되고 싶은 나, 바라는 모습으로 한걸음 한걸음 생생히 살아가는 삶의 역사,
그 모든 과정을 의미하리라.
 
+ 알파를 찾았다.



걷다 보니, 쓰다 보니는 살다 보니와 무늬와 결을 같이한다.

살다 보니는 살아내기다. 그저 흐르는 시간과 세월에 나를 맡겨 버리고 방치하는 게 아니라 또렷한 눈빛,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과 이 삶을 들여다보고 이끌고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나를 단단한 무늬로 꾸려가고 이끌어가는 삶은 어느 아픈 영혼에게는 작은 등불이, 어느 지친 방랑자에게는 앞서 걷는 자의 발걸음이 되리라는 소망으로 이어지니, 나의 시간이 나의 무늬를 직조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하는데 그 의미를 더해본다.


걷는 일, 쓰는 일. 나에게는 사는 일이다. "사는 일이니까"가 답이고 이유임을 알았으니

허투루가 아니고 제대로 다시 살아내기는 나의 인생과제다.

그러니 쓸 수밖에,

저러니 사랑에 빠질 수밖에,

당연히 어려운 일이나,

마땅히 좋아하는 일이니,

어쩔 수가 없다. 다른 수가 없다.

걷고 읽고 쓰고 살아갈 뿐. 심플하고 쿨한 답에 이른다.

공원에서 찾고, 문장속에서 선택한 나의 자유다.  


이모두가 걷다보니 쓰다 보니, 그 여정 속에 알게 된 마음이니 시작하기를 잘했다.

어떻게든 시작한 마음의 뿌리는 '다시'이겠지.


'다시'는

접힌 무릎 펴고 일어서는 용기다.

'다시'는

여행자가 내딛는 발걸음이다.

'다시'는

세상에 나를 쏘는 방아쇠다.



1 더하기 1은 2다. 그런 줄만 알았다. 가설을 증명하는 건 근거있는 논리와 명백한 수식뿐인줄 알았다.그게 과학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 삶의 모든 문제에 대입하여,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똑 부러지게 답을 찾아 사는게 잘사는 정답인거라 생각했다.


살아가는데 정답은 없었다.

새빨갛게 지친 눈으로 찾아 헤메였던

근거나 논리 보다는 

똑소리나 딱 부러지는 설명 보다는

이제,

툭 내려놓고 뚜벅뚜벅 찾아가는건

정답이 아니라 

방향이고 리듬이다.


긴긴밤 시간의 밀도는 허투른 어젯밤과 다르고,

오후늦게 쏟아지는 풍성한 햇살은 작년의 오늘과 달랐으며

짙은 안개가 사라지는 속도는 과거보다는 미래를 앞당긴다.


불확실하지만,

아직은 답답하지만,

신뢰한 수 있는 근거는 

하염없이 글쓰는 내마음이다.

책임있는 논리는

그저 흐르는 문장의 강물이다.

그렇게 나를 설명하고 증명하고싶다.


1 더하기 1은 2 가 아니다.

1 빼기 1은 0 이 아니듯.




렇게 작으나마 매듭을 짓고, 다시 여행길에 나선다.

먼 길 나서기 전에는 먼저 목욕탕엘 가야 한다. 타인에게 괜찮고 근사하게 보이려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나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함이다. 나만의 세리머니다. 나만의 환골탈태다.


나는 지금 목욕탕에 간다.

승기, 과묵, 아야, 허당, 헤롱, 발랄, 생생, 깜짝새, 솔개 김선생, 메시, 선미언니 모두 데리고 간다.

바나나우유 초롭 마시며 짐가방을 꾸리려 한다.


눈이 부시게 근사하며 자유로운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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