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선물

by 김호섭

백일장이 열렸다.

백일장이라니.

초딩 중딩때 학교 또는 시청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한 기억을 끝으로, 무려 사오십여 년 만에 들어본 단어다. 글짓기 대회다. 복 짓는 젊은이 #전유정 작가님이 이끄시는 #문장공부 단톡방에서 백일장을 한다며 주제를 발제하셨다. (*문장공부 모임은 매일매일 책에서 길어올린 한 문장을 각자의 시선에서 바꿔 쓰고 고쳐 써보는 작가님들의 글공부모임이다.)




100일 동안 원하는 사람의 몸을 빌어 살 수 있고 100일 이후 그 몸으로 살지,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올지 선택하면 된다는 주제인데 관련 문장을 각자수집하고 고쳐보는 기가 막힌 백일장이다. . 써보자.



신의 선물이다.


상상이지만,

기막히니 흥분되고 막막하니 혼란이다.

이순신 장군님이 되어 나라를 구하고도 싶고, 김훈선생님이 되어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고, 메시처럼 환상적인 드리블로 그림 같은 골을 넣고도 싶고, 외계인이 되어 아름다운 지구별을 바라보고 싶다.

한편으론 젊음도 바라노니, 진짜 이승기가 되어 옛 연인 소녀시대 윤아와 다시 만나 결혼도하고 알콩 달콩 살고 싶기도 하다.


욕심이 과하다. 과하면 탈이 나는 법. 기회는 한 번뿐, 단 한 사람의 몸으로 살아감이 규칙이다. 며칠을 고민하다 주말 나들이 코스인 서점에서 햇살 같은 미소와 함께 그녀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국민배우 김혜자 선생님이다. 그래. 드디어 찾았다. 김혜자 선생님의 몸으로 살고 싶다. <생에 감사해> 책 표지에 환희 웃는 선생님 사진을 보고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미소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존재감은 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다. 국민 엄마 그 자체다.


국민배우 국민엄마 김혜자.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연기자로서 보다는 한 개인의 존재로서 그녀의 삶이 궁금하다. 책 서두에서 읽은 문장은

“배우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배우에게는 유일한 빛이고 희망입니다. 또한 그것이 배우가 세상에 줄 수 있는 희망의 빛입니다.” 다소 의외다. 배우를 직업의 하나로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아니다.

“나는 배우를 직업으로 생각한 적이 없어요. 배우는 나 그 자체입니다.”

그녀는 이 한마디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백상예술대상에서 그녀가 한 말도 떠오른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엔딩 대본이다.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연기자로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한 개인으로서,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김혜자.

당장 그녀의 삶으로 뛰어든다. 오늘부터 1일이다.




(80년대 이승기 + 혜자 = 승자) 승자는 온종일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명성과 품위에 걸맞게 후배 연기자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새로운 영화도 찍고 드라마와 광고에 출연하며 국민적 사랑은 물론, 우아한 품위로 격조 높고 인정받는 삶을 살아간다. 아름답고 꿈결 같은 100일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하지만, 승자는 한 치의 고민 없이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온다. 100일 내내 혜자의 몸으로 살아오면서 바래온 것은 비단 그녀의 우아한 명성과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가 아니었다. 정작 원했던 것은 그녀의 깊고 푸른 눈빛이었다.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키 어려운 심연의 바다.

그 바다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코발트블루 빛 정수.

배우로서 치러 내야 할 수많은 역할과 장면을 혜자는 삶 자체로,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가슴으로 울고 웃으며 날카로운 지성으로 건져 올린다. 몰입의 우주!

그 우주가 모여 발산되는 곳. 눈이다.

그 찬란한 빛은 경이로운 그녀의 눈빛이다.


아무리 그녀의 몸으로 산다 할지라도 그 눈빛은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그럴싸한 연기를 해봐도 따라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천의 얼굴 배우는 곧 혜자이니 그 깊은 경험의 밀도를 어찌 감히 판단할 것 인가. 그래서 ‘혜자다’라는 고유명사대신 ‘혜자스럽다’라는 형용사가 널리 쓰인다.

그러니 혜자는 유일무이하다. 승기는 묵묵히 나로 다시 돌아온다.



다만, 쭈글거리며 위축되진 않는다. 다부진 질문부터 던진다. "나는 무엇으로 세상에 희망의 빛을 줄 것인가?" 똑같은 개인이 없듯이 똑같은 우주도 없다.

나만의 우주를 만들자. 나만의 눈빛을 창조해 보자. 이렇게 말이다.


“작가는 글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작가에게는 유일한 빛이고 희망입니다. 또한 그것이 작가가 세상에 줄 수 있는 희망의 빛입니다.”허름한 일상의 글이지만,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는 반딧불이 같은 친구가 되어주고 잃어버린 길을 밝혀주는 등불 같은 그런 글을 쓰자. 글이 곧 희망의 빛이다.


"오늘을 살아가세요. 몰입의 눈빛과 따뜻한 미소로 세상과 인간을 관찰하세요. 작가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 보자. 우리 모두가 자격이 있다. 문장을 매일 몰입하여 공부하고 매일 따뜻하게 고쳐쓰니 지극히 당연하다. 생에 감사해야 할 일이다.


몰입의 눈빛과 따뜻한 미소!

혜자 선생님께서 주신 계묘년 새해 선물이다.


신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