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양말을 말리고

by 김호섭

덜 마른 양말을 신고 출근길에 오른다.

차 안에서도 몰랐고,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몰랐다.

컴퓨터를 켜고, 커피 한잔 내리고 자리에 앉으면서야 눈치챘다. 발이 시리다. 덜 마른 양말을 신고 왔구나.

인간아 인간아 이 인간아.

정신아 정신아 내 정신아.


'바람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다가 일어난 소소한 사건이다.

일단 어떤 생각에 빠지면 그 상념의 바다에서 대책 없이 허우적 헤엄치는 오래된 이 습관은

좋게 말하면 몰입이겠고, 우습게 말하면 허당이라 할만하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상념의 시간에 들어서면, 일상생활에 여러 가지 해프닝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별의별 사건들이 꼬리를

문다. 가끔 생각해 보면 헛웃음이 슬쩍 나오는 정도의 그런 해프닝이다.


그래도 젖은 양말을 신고 나올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이 들어 빠져든 춤바람? 아니 글바람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오늘은 바람의 모습이 궁금한 아침이다.




바람은 어떤 모습일까.


살랑살랑하니 사랑스럽고 귀여운 봄바람

집채 같은 파도의 모습을 한 여름바람

솔솔 부니 솔방울 닮은 가을바람

칼같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겨울바람


모습은 다양하고 질감은 다채롭다. 하나의 형태로 섣불리 단정하거나 상상할 수 없다.

그러니 바람은 사람을 닮아있다. 한 사람 안에도 여러 모습이 있으니.

바람과 사람. 이 둘의 교집합은 천 겹의 얼굴이다.

한풀 한풀 헤집고 한 사람의 깊고 선명한 스펙트럼을 보고 싶듯이

한결 바람의 모습이 궁금하나 알기가 어렵다.

바람은 어찌 생겼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흐르는가.


그래도 이미 답을 아는 친구들이 있다. 어여쁜 선생님이 이끄시는 OO유치원 아이들이다.

바람색 크레파스가 없다고 투덜대는 그 아이들은 분명 알고 있으리라. 바람의 모습을.


눈 맑고 영혼 밝은 아이들의 대답이 궁금하다.

바람의 모습이 궁금하다.

사람의 모습이 궁금하다.




새벽 댓바람마다 불어오는 글바람은 어떤 모습일까.

이 바람은 어떤 모습을 하고 나에게 와서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사실 이제는 궁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집중하고 재미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될 일이리라. 그 다음은 바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어여쁜 바람도 잘생긴 바람도 조금 모자란 바람도 괜찮다.

글 바람이 알아서 나를 배에 덜커덩 태우고 휘리릭 나아가겠지.


저 머나먼 글의 바다에 둥실 닻을 올리고 힘찬 뱃고동 울리며 출발하는 승기호!

이 허름하고 낡은 배의 목적지는 또렷하다. 시작항이다.

시선이 따뜻한 작가가 된다는 항구.

나의 목적지다.

나의 또 다른 출발지다.


비바람이 불어도 눈바람이 불어도

그 어느 날엔가는 젖은 양말도 마르겠지. 뽀송뽀송 따수하게.

시작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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