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때가 있다. 슬픈 음악을 들으면 구구절절 애절 철철 노랫말이 꼭 내 얘기 같은 때. 귀에 착착 달라붙고 마음에 콕콕 박힐 때. 가사와 멜로디만으로 술잔이 눈물 젖을 때.
영화나 드라마 또한 다르지 않다. 달달 로맨스 스토리나 영웅적인 서사에, 잘 생기고 화려한 주인공에 자신을 투영하여 정신없이 스크린이나 TV 화면에 퐁당 빠질 때.
책은 어떨까.
소설은 긴 호흡의 스토리와 탄탄한 구조, 현미경으로 보는 듯한 핍진성과 주인공의 미묘한 심리와
등장인물 간의 갈등 또는 반전 스토리에 빠지는 때가 있고,
시는... 짧은데 깊은 문장, 여백을 거닐 때?... 잘 모르겠다. 어렵다.
에세이는 단연코, 위로와 공감, 심금을 울리는 문장에 울고 웃을 때이겠지?
아무튼, 장르를 불문하고 책은 역시 정제된 문장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듯싶다.
<걷기의 즐거움>. 출판사로부터 리뷰 제안을 받자마자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로다! 후훗 거리며, 덥석 손을 잡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새벽을 거닐고 문장을 노니는 문학소년은 책이 도착하기만을 첫눈처럼 기다렸다.
이 책은 17세기 중엽 ~ 20세기 초반 영미권 작가들의 작품에서 "걷기"라는 주제로 쓰여진 부분을 발췌하여 묶어낸 선집이다. (엮은이. 수지 크립스. 인플루엔셜 출판사. 2023)
P8 : (엮은이 서문) 혼자 걸어서 여행할 때처럼 완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고, 감히 표현하자면 그렇게 삶을 영위한 적도, 그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 되어본 적도 없었다. - 장 자크 루소
P72 : 들판이 그의 서재이고 자연이 그의 책이다. - 로버트 불름필드
P73 : 쓸쓸함. 그건 너무 달콤하지, 내가 말을 걸며 중얼거릴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하고 - 윌리엄 쿠퍼
P84 : 우리는 마치 새장에 갇혀 지내다가 이제야 해방되어 새롭게 날갯짓하는 새와 같았다. - 버지니아 울프
P115 : 우주 자체가 하나의 길이며 여러 갈래의 길이고 여행자의 길임을 알기 위해 - 월트 휘트먼
P144 : 아! 위대한 적막감이여! 분주한 시인의 마음마저 정복하는 그대여! - 존 다이어
선집이니만큼, 스토리보다는 우선 문장에 집중해 본다. 놀라웠던 부분은 작가마다 걷기라는 (어찌 보면) 단순한 행동을 색다르고 다양하게 해석하고 표현한다는 점이다. 선별된 작가의 분포를 잠시 보자. 대부분 작가가 국가적으론 영국. 시대적으로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 전 세계로 대영제국의 깃발이 펄럭일 때. 이성주의에서 낭만주의, 사실주의로 전환되는 시기의 작가들 글이 주를 이룬다. 시대와
그 시대를 흐르는 문예사조 또한 글의 다양성과 특이성,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느낌을 알게 된 건, 선집의 효능 중 하나이겠다.
이렇게 다양한 작가와 해석과 문장이 있지만 책을 관통하는 한 단어는 역시"즐거움"이다. 자신만의 속도와 의미와 느낌으로 걷는 즐거움. <걷기의 즐거움>이다.
문장을 따로 정리하다 말았다. 박연준 시인의 추천사처럼 일상이 갑갑해질 때마다 들고나가 걸으며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고 싶은 책이다. 책은 역시 문장이겠지만, 음악이나 영화처럼 책도 내 얘기인 양, 내 마음인 양, 몸을 기울여 다가가는 때가 있다. 그런 책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대한민국 작가들의 걷기도 궁금해진다. 나의 걷기는 어떠한가. 즐거운가. 왜 즐거운가. 길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길 위에는 또 어떤 문장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