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내려가 보자

by 김호섭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말할 수 있다.


낯이 익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의 문장이다.

언젠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본 문장인데, 마치 보뱅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옆자리 소년에게 단단히 건네는

듯한 한마디. 깊은 울림이 느껴져 한참을 읽고 또 읽었던 문장.

돌이켜 보면, 나의 어떤 부재와 결핍이 글의 길에서 동네방네 좌충우돌, 읽고 쓰는 하나의 동력이 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문장을 다시 만난 건 콧물감기로 골골거리던 엊그제. 일요일 아침.

콧물과 방구석을 박차고, 동네도서관으로 나들이 가던 길에 혹시나 하고 가본 곳.

역사와 전통의 인성여고 앞 골목에 수수하게 자리 잡은 수수미용실. 길 위의 칠판.

멀리서 봐도 뭔가 알차게 적혀있는 문장이 보인다. 월척이라도 본 어부마냥 소년은 한걸음에 달려간다.


<길 위의 문장들> 첫 문장을 만나고 혼자 괜히 감격스러워하던 곳.

칠판에서 낚아 올린 한 문장과 본인사진뜬금없이 인스타에 올렸던 바로 그 장소.

그날의 문장.


꽃구경은 따로 안 가도 되겠다.
네가 꽃이니
2023.05.29 인천 송학동 수수미용실 문장 칠판. 옆 사진은 3년 전 꽃처럼 어여쁜 소년의 사진임. 지금은 폭삭 늙어버림. 글쓰기의 부작용이 틀림없음.)



인성여고 교정도, 골목도, 칠판 위에도 가을 가루가 넉넉히 뿌려져 있으니

연두에서 황금으로

봄에서 가을로

정확히 5개월 만에 칠판 앞에 다시 선 소년은

생각이 깊어진다.


나의 부재와 결핍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동안 주장해 온 건 얄팍한 핑계나 비겁한 변명은 아니었을까.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찾고 채우려는 것은 무엇인가.

내 마음의 중심을 울리는

그것은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제대로 보고 말하고는 있는가.


5월 말의 시작은 유쾌했는데

10월 말의 일요일은 다소 무겁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하지는 않기로 한다.

무거운 질문도 몰라서 일뿐. 답을 알면 가벼워질 테니.


궁금할 때 가는 곳.

비운 곳 채우려 할 때 가는 곳.

오늘의 문장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고

소년은 도서관으로 향한다.

좀 더 내려가 보자.

내가 나를 고만 좀 괴롭히고

이젠 좀 즐겁고 가볍게 가보자.

무거우면 오래 못 갈 터.


읽다만 크리스티앙 보뱅을 다시 읽어보자.

이 가을에.


#인천 #송학동 #수수미용실 #사장님 #고마워요 #봄 #가을 #문장 #칠판 #크리스티안보뱅 #작은파티드레스 #부재 #결핍 #꿈벗도서관 #걷기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