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오거라. 겨울아.

by 김호섭


시월 중순 무렵, 김치가 똑 떨어졌다. 한국인의 밥상에 기본반찬인 김치이지만, 방구석에서 밥 해 먹을 일이 거의 없으니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시월 말쯤 되자 깨달았다. '나. 한국인이구나. 라면을, 국수를, 햇반을 김치 없이 먹기에는 무척이나 곤란하구나.'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어도 무엇이든 꼭 겪어보고 느껴봐야 아는 소년은 허당스럽거나 정직하다.




이 곤란 지경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슬기로운 아저씨 생활이 되려나. 마트에서 파는 김치는 너무 소량이고 무척 비싸다. 회사 구내식당 어머니께 조금만 싸달라고 하려니 그건 너무 궁색이다. 팔순 중반의 우리 엄니께 말씀드리면 불편하신 몸으로 당장 큰길 건너 시장으로 달려가실 테니 위험하다. 배추 사다가 내가 한번 김치를 담가볼까 하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아셨을까. 11월 중순 무렵에, 옆방 어머니가 겉절이를 한 통 담아 방문 앞에 놓아주셨다. 여름에는 삼계탕, 매운 닭발, 인도 카레 등 여러 음식을 놓아주신 고마운 분이시다. 날개 잃은 천사가 옆방에 사시니 난 정말 행운아다. 꿀맛 겉절이로 소년은 다시 한국인으로

돌아온다.


지방 사는 누이동생의 연락이 왔다. "오빠, 오늘 김장 다 끝나서 싣고 올라갈 테니 저녁 늦더라도 본가로 와. 수육도 했으니 드셔보셔." 11월 말 일요일, 최강 구원투수 등장이다.


바다에 절인 배추와

쌍화탕 마시고 맥주에 빠진 수육

압도적 스케일!

시선과 비주얼을 다잡은 기가 막힌 맛!

그보다 더 깊은 풍미는 가족의 사랑!


드디어 왔다. 매제는 물론, 누이동생의 식구들이 총동원되었다. 친정 식구들을 위해 몇 시간이고 이고 지고 왔다. 고맙다. 동생아.


소년은 사랑과 정성 가득한 김치 한 통을 따로 담아 방문 앞에 살며시 놓아둔다. 고맙습니다. 옆방 어머니.


한 아기가 태어나면 온 마을이 키운다고 하였고

한 아저씨가 곤란지경에 빠지면 이렇게 가족과 이웃이 나서나 보다.

잘 살아가야겠다.




이로써 월동 준비는 끝났다. 12월 3일이다. 3주 후면 크리스마스다.


그래 겨울아. 길고도 시린 계절아.

이제 오거라.

나에겐 한 통의 겉절이와 열두 포기의 김장 김치가 있다.


한줄 요약 : 겨울도 두렵지 않다. 사랑 버무린 김치와 함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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