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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Jun 06. 2022

아버지의 이름으로

구두를 닦는다.

구두를 닦는다.

 나이 들면서 여차저차 줄어든 사회생활 탓에 신고 나갈 일도 별로 없었고, 팬데믹으로 국내 고객사 방문, 해외 출장길이 막혀서 이 아이는 신발 장안에서 그저.'나는 구두다'라는 고색창연한 구색만 담당하던 아이다.

다른 건 대부분 버리고 완앤온리다. 오래되었고 자주 닦지도 않아왔으니 열심히 애써보지만 광이 안 난다.




누구에게나 '라떼 is Horse'하는 시절이 있을 것이다... 제법 돈벌이가 괜찮았던 그 시절, 내 모습이 보인다.  회사 후배들이

"선배님, 제발 명품.(옷) 챙겨 입고, (구두) 신고, (차) 타고, (시계) 차고 좀 그러세요. 아이고 허구한 날..."

"명품은 뭐하러. 내가 명품인데... 무슨 쓰잘데기없이"

이러한 근거 없는 본인 명품설을 뿌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의류나, 차, 시계, 구두, 기타 사리 등. 명품과는 거리가 멀다. 아주 멀다.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오며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쳐 오신 부모님 생각을 하면 어찌 나만을 위해 허투루 돈을 쓸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본인 명품설보다는 합당한 근거다.




오늘은 군대 시절 고참들 군화 불광 내듯 열심히 구두를 닦는다.

며늘아가가족들과 상견례가 있기 때문이다.

상견례라니.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는 행사다. 

어이쿠.

구두도 구두지만 사돈어른, 사부인과 막상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거지?

구두를 닦다 말고 서둘러 책상머리에 앉는다.

어떤 어젠다로 대화를 할 것인지 그 주제를 미리 생각하고 적어보려는 걱정과 불안의 발로이다.

국대급 '과묵'인 내 성향 탓에 '중요한 자리가 어색 만발이거나 사돈 가족께 괜한 불편을 끼치면 어쩌나.'

'사돈어른도 만일 한 과묵하시다면?'

어이쿠. 커지는 건 불안이요. 나는 건 진땀이다


몇 가지 예상 대화 주제를 적어보다가 곧바로 펜을 내려놓았다.

어떤 비즈니스 미팅이나 업무회의 그런 게 아니라 상견례라 함은 말 그대로 서로, 보고, 예를 다하는 자리 아닌가? 예쁘고, 착하고, 단아한 따님 키우시면서 살아오신 히스토리와 에피소드를 여쭙고, 결혼식 세부 일정, 축하의 덕담을 나누고 예를 다하여 진심의 마음을 전하면 되는 일.

오늘 꺼내 든 카드는 '본질과 진심'이라는 용기의 카드이다.


일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 용기 카드. 자체 발급한 나만의 히든카드 이지만 이런저런 숙취해소. 아니 불안

해소에 특효다. 상견례라는 단어를  들여다보고 핵심적으로 관통하는 메시지를 찾아내 보는 시도. 또다시   '관찰의 힘'이겠다. 이런 일상의 불안 해소 사례를 모아 모아 차제에

'용기카드 불안해소설' 정도는 뿌리고 다닐만하겠다.




다시 신발장 앞으로 건너와 구두를 붙든다.

이번엔 아버지가 보인다. 아들을 장가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셨을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30여 년 전 나의 결혼 시점에 상견례는 생략되었다. 간암 말기로 침대에만 누워계셨던 아버지는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들의 결혼식장에 나서셨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성당의 결혼식에 아버지는 환복이 아닌 양복으로, 슬리퍼가 아닌 멋진 구두를 신고 계셨고 육신의 고통을 마다하고 허리를 곳게 펴고 앉아계셨다. 

그 결혼식 후, 몇 개월 후에 아버지는 영면하셨지만

아버지의 삶에서 뜻을 세우신, 아들에 대한 마지막 과제를 과묵하지만 너무도 멋지게 이루어내신 거였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아들아. 본인 명품설도 좋지만 궁상은 피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맞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아들이. 며늘아가가 주인공인 날이다.

본인 명품설을 고집할 때가 아니다.


명품은 아니더라도 중저가 와이셔츠라도 넥타이라도 단정하고 정갈한 걸로 갖추고 예를 다해야 할 일이다.

그러고 보니 구두에는 광이 살아났다.

구두는 그냥 이 아이를 신고 가자.

아버지의 말씀이 담긴 최고의 명품 아닌가.


대문을 나선다.

동네 의류매장으로.

힘차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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