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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May 03. 2024

어른의 쓸모

퇴원한 지 나흘이 지났는데 뒤늦은 통증이 밀려온다. 오른 손등에 맞았던 주사자리가 퉁퉁 붓고 피멍이 들며, 조금만 손을 써도 저릿저릿하다. 호흡기를 감염시킨 괴상한 바이러스에 적합한 항생제를 찾으려 주사 바늘을 여기저기 꼽다 보니, 그 여러 번의 시도 중에 뭔가 탈이 난 게 분명하다.


입원 첫날밤에 맞았던 주사가 유난히 통증이 심했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딱 봐도 초보로 보이는 간호사는 오른 손등에 주사를 여러 번 시도하면서 진땀을 흘린다.  잠시 후, 고참 간호사가 와서 오른손등의 주삿바늘을 빼고 왼손등에 다시 놓는다. 약에 취하고 고열에 취해 있던 상황이라 혼미한 기억이지만, 오른 손등 전체가 찌릿하게 저려오던 느낌이 아련하다. 덜덜 떨던 초보 간호사의 진땀 나는 긴장과 심하게 야단치던 고참 간호사의 타박만은 병실에 가득했고 잠결에도 고스란히 기억난다.




병원에 다시 간다. 담당의사와 상담을 하며 증상을 설명하면서도, 속된 말로 개진상을 부리진 않는다. 차분하게 할 말만 한다. 나의 아들도, 나의 며늘아가도 8년 차 현직 간호사이다.

'그들도 이런 초보 시절, 막내 시절, 덜덜 떨던 시절들이 있었겠지, 의료 현장에서 두렵고 무섭고 진땀 나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라는 애잔한 생각에 이르니 그날, 초보 간호사의 실수를 더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어디 아이들 뿐인가. 수십 년 전 파르라니 새파란 신입사원 시절의 나는 어떠했는가. 천재 프로그래머가 득실 거리는 OO그룹 정보시스템실에서 호랑이 부장님께 연일 야단 맞고, 재떨이 맞고, 결재판 맞고 욕 맞고 타박받던 나. 한 치의 오차도, 한 줄의 코딩 오류도 허용치 않던 초정밀 반도체 생산관리 품질관리 공정관리 전산 시스템.

선배들의 집중 관리와 지도 속에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소스 코딩북을 죽어라 외우던 그 시절의 어린 양.

펄펄 날던 천재 도사 선배님들 틈바구니에서 난 얼마나 하찮고 어리숙한 초보 직장인 나부랭이였던가 말이다.



  

우리 모두는 초보였다. 신참이었고 막내였다. 익숙지 않고 숙달되지 않으니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덜덜 떨 수 있다. 어지간히 큰일이 아닌 이상, 너무 쥐 잡듯이 타박하거나 분노할 일은 아닌 듯싶다.

정작 분노를 향해야 할 곳은 다른 곳에 있다. 이미 리더의 자리에 있거나 지도자의 위치에서도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의 아집만을 고집하는 인간들. 그런 집단들이 바로 그들이다. 의료 대란이 벌써 몇 달째인데

도대체 해결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이들을 생각하면, 분노의 치사량을 넘은 지 오래다. 의료 현장에서 격무에 시달리느라 얼굴이 반쪽이 된 아이들 얼굴을 떠올리면 천불과 화병이 저절로 도질 지경이다.


글 벗 @철학하는 현자님은 철학자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못한 '철저한 무사유'가 유대인 학살의 총책임자 아이히만을 희대의 범죄자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잘못 인지된 얄팍한 권력과 기득권의 '철저한 무사유'에 우리는 저항하고 분노해야 마땅하다. 그 들의 '철저한 무사유'가 일반 서민들의 삶에 얼마나 지대하고 치명적인 아픔을 쥐어 주는지 그들은 알아야만 한다. 그들은 초보가 아니며, 초보이어서도 안된다. 신께서도 초보에게는 그렇게 막중한 임무와 책임을 맡기지 않는다.


인생도 세상도 불공평할지 몰라도 우리의 생은 정직하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쓸모를 저 버리는 위정자의 어리석음은 시간 속에 밝혀지고, 역사 속에  심판받는다.

 



초보들은 실수를 통해 극복하고 배우고 익히는 과정 속에 어느 날엔가 고참의 자리, 베테랑의 자리에 올라설 것이다. 훈련과 경험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왼손 필사 시작한 지 어느새 8개월이 지났다. 오른손이 이렇게 갑자기 아프리라 예상해서 미리미리 대비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준비된 자는 당황하지 않는다. 원고지 위에 펼쳐진 광활하고 네모난 초원을 이제 제법 어여쁜 몸짓으로 신나게 질주한다.

회사 결재서류는 왼손으로 사인하고 손님이 오면 왼손으로 악수하면 된다.

두 손 한아름 품어 안을 여자 친구는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 이 또한 다행이다.


세상 모든 일이 이머전시는 아니다. 위중과 경중을 판단하고, 마이너 한 일은 툭툭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하고 타인의 입장도 배려해 가며 주변을 돌아보며 살아가는 모습.

어른의 모습이란, 어른의 쓸모란,

어떠해야 하는가 다시금 생각해 본다.  




오른 손등에 붕대를 감고, 항생제를 처방받아 병원문을 나선다.

"죄송해요." 고개 숙인 초보 간호사에게

"괜찮아요. 열심히 배워요." 씽긋 미소 지으며 쿨하게 퇴장한다. 초보 간호사가 너무 야단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월은 푸르고 우리들은 자란다.

뻐근하게 저리도록 근사한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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