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이사 가셨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새로이 둥지를 튼 곳은 바로 근처 옆집이었다. 다행이다. 무려 50여년.역사와 전통의 <아벨서점>이다.
일요일 아침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듯, 장마 뒤 폭염에도 발걸음은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신난다.
인천 배다리 헌책방 골목의 산 증인, 곽현숙 대표님은 부재중 이셨지만, 여리여리 흰머리 문학소녀 아벨지기님께서 반갑게 맞이하신다.
"아유. 왜 이리 오랜만에 오셨어요. 어제는 김소월 시인의 시집 전시회도 있었는데..." 전시회 소식은 듣고 알고 있었지만, 여차저차 시간을 놓친 소년은 뒤통수를 긁적거린다.
"그간에도 건강하시죠? 좀 바쁜 일들이 있어서 그간 찾아뵙지 못했어요. 조금씩 써온 글, 모아 모아 이번에 출간하게 되었답니다. 그동안 귀한 말씀과 관심 주신 아벨서점에 감사의 표시로..." 민망한 두 손으로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놓는다. 자신의 책을 고마운 분들께 선물한다는 경험은 난생처음이다 보니 당장 민망이 앞장선다. 그 민망을 멈추고 나서니 <멈춤을 멈추려 합니다>.
문학소녀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그러실 줄 알았어요. 수십 년 만에 아벨에 왔다며, 이태준의 <문장강화> 책을 골라 가실 때, 저는 오호... 심상치 않은 양반이로세... 했거든요. 눈여겨보았는데, 정말 큰 일 해내셨네요. 책을 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잠깐만요. 날도 더운데 잠시만요." 문학소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햇살처럼 나타났다. 수박화채 한 그릇 소담스레 쟁반에 담아.
"어제 행사 때 대표님이 손님들께 대접해 드린 화채랍니다. 물에 탄게 아니라 수박즙을 곱게 내어 얼음 동동, 수박 둥둥 띄운 거랍니다." 소년은 연신 넙죽거리며 달디달고 달디단 화채를 한 스푼 떠서 들이켠다. "우와. 기막힌 맛입니다. 이것은 꿀인가요. 수박인가요." 수박화채를 언제 먹었더라 기억해 보려 애쓰지만 없다. 기억도 추억도.
소년은 2층으로 올라가 소월님께 폴더 인사드리고, 진달래빛 가득한 전시실을 둘러본다. 아벨지기는 그 사이에 소년의 책을 읽어보시고. 라디오에선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일요일 헌책방 골목에서 빚어낸 잔잔한 시간에는 진달래 향기가 꽃분홍 약산에 온통 가득했다.
진달래 담근 술이라도 한 잔 한 듯 소월에 얼큰히 취해, 근 한 시간을 2층 <시 다락방>에 머물던 소년이 1층으로 내려오자, 아벨지기께서 한 말씀하신다. "작가님의 책을 일부 읽었는데요. 이 책은 작가님이 작가님께 쓴 제문 같아요. 지난한 자신을 고운 손으로 좋은 곳에 보내드리는
제문, 아픈 마음에게 이제 그만 아파하고, 새롭게 태어난 자신에게 축원하는 축문. 그러니 분명합니다. 지금이 작가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이에요. 축하드립니다. 지금을 마음껏 누리세요." 가슴에 뭔가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귀한 말씀에 소년의 동그란 얼굴 동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아... 글을 쓰는 내내 많이 괴롭고 힘들면서도 계속 써야만 했던 그 심정이 궁금했거든요. 너무도 귀한 말씀이십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수십년 전통의 서점지기답게 한마디 한마디 말씀 속에 깃든 기품이 소년의 가슴을 쿵쿵 울린다.
책방에 한 분 두 분, 손님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소년은 책 두 권을 골라 계산하고, 서점을 나선다. 땅과 하늘 사이에 불가마 사우나의 열기가 가득했지만, 소월의 책숲을 고즈넉이 산책하고 아벨지기의 귀한 말씀에 화채까지 곁들여 발그레진 소년은 더위를 잊은 듯, 선선한 발걸음으로 방구석으로 돌아온다. 어느새, 진달래꽃 행렬이 아름 따라 뒤를 따라 같이 걷는다.
"행복이 별거냐. 감사한 시간, 그 시간을 나누는 순간, 소박한 화채 한 그릇. 이런 게 행복이지. 그럼. 그렇구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