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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적인 필사

by 김호섭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사무실에 좀 일찍 출근한 어느 가을날, 조그만 메모지에 왼손으로 글씨를 써 보았다. 생각보다는 귀여웠고 실망보다는 낯섦이었다.

믹스 모닝커피 한 잔 하면서 물끄러미 나의 왼손글씨를 바라보다가, '어디 한 번 해보자'며 썰렁한 사무실에서 혼자 '도전!'을 외쳤다. 왼손필사! 지루한 일상을 타개하려고 선택한 웅대한 결심은 아니었고, 그저 왼손의 존재와 쓸모에 대한 호기심이 그 시작의 출발이었을 것이다.

호기롭게 시작은 했으나, 몸과 의식이 따로 노는 황당과 만성이 되어버린 손가락 손목 염증, 글자와 글자 사이에 눈물 어린 안구건조증이 함께했다. 회식이 있던 날엔 ㅏ ㅑ가 취했고, 피곤에 절은 날엔 ㅇ 과 ㄹ 이 울었다. 어떨 땐, 이걸 도대체 왜 하고 있는지, 바쁜 시간과 나날 속에 이게 웬 허송세월인가 신경질도 올라오니, 애써 미워도 하고 외면도 했다.

그런데, 신기했다. 고통속에 행복 온다더니 어느 시점부터
무념무상과 고요의 경지? 에 몰입되어 짧은 시간 속에 길게 머무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문장이 보이고 저자의 쓰는 마음이 저벅저벅 옆구리에 다가와 소복소복 마음에 쌓인다.
오호라. 슬로우 리딩!

어느새 여러 계절이 바뀌고 1년 반이 흘러, 이제 매듭의 시간이다. 중간중간 다른 책들의 부분 필사와 병행하다 보니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흘렀다. 계절의 이음새나 꿰맨 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매듭은 그야말로 얼기설기 엉성하며 억지춘향 꾸역꾸역 진땀의 강이 흐른다.

김훈 선생의 <연필로 쓰기>.
통필사를 이제 겨우 마무리한다.

예쁘고 멋진 글씨체로 다듬기보다는 바르고 정갈한 글씨를 써보려 한 것이 우선의 목표였는데 여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고, 문장 공부에 깊은 공을 들이지 못함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창때, 동네 도서관 죽돌잉 하던 시절에는 삼 년 동안 천권의 책을 닥치는 대로, 잡히는 대로, 쾌속으로 읽곤 했는데 독서의 효과면에서 동일한 비교는 할 수 없겠으나 이런 독서 저런 독서해가면서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리라 생각도 해본다.

왼손필사가 알려 준, 극도로 천천히 읽는 독서는 긴 호흡이 필요한 일이겠다. 차분하게 글의 길 걸으며, 그대 기다리는 마음이겠다. 살아가면서 그런 책이 있다.
그런 일이 있다.

선생의 <허송세월>로 다시 새로움의 도전을 이어간다.

이 시점에, 기가막히고 코가 막히며 딱 떨어지는 제목이다.
이제 어엿한 2학년 개나리반이 되었으니,
잘 늙어가자. 넉넉히 익어가자.

감기 끝에 집 나간 입맛이 돌아올지 모르지만,
오늘 점심에는 신포동 내려가 짜장면 한 그릇 사줘야겠다.
내가 나에게.

(※왼손필사의 길을 열어주신 @희수공원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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