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동치미는 술보다 강하다

by 김호섭


너무 추워 방구석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날, 멍한 저녁에 더 멍멍해진 마음에 두 가지 질문을 해 보았다.

첫째.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고 난 뒤에는 왜 입맛이 없어지고 왜 안 돌아올까? (글의) 영감님이 집 나간 지 오래인데, 입맛

마저 영감이 데리고 나갔는지 오래도록 감감무소식이고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극심했던 꺼끌 인후통이 문제일까, 콧물 재채기 맹맹 비염이 문제일까.

뭐를 먹어도 아무 맛도 안 난다. 무맛이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무를 먹으면 무맛이라도 나는데, 지금의 입맛은 없을 무 맛맛이다. 없는 맛. 아니다. 맛을 잃어버렸으니 잃을 실 맛맛이다. 아니다. 맛맛이란 한자어가 어딨냐. 잃을 실(失) 맛 미(味). 그렇지. '실미'가 정확하겠지? 월미도 근처에서 실미통의 나날이 반복된다. (미식가는 아니지만) 입맛을 못 느끼니 살맛이 안 난다. 술맛조차 모르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병원에 전화해 보았으나, 입맛 돌아오는 약은 없단다. 간호사 선생님은 낄낄 웃으며 "며칠 지나면 돌아올 거예요."

라며 깔깔 말한다. 환자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 못 해 주는 어느 의료진에게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벗님들이여. 입맛 돌아오게 하는 신박한 방법 좀 알려주시라. 제발 ~)

둘째.
'실미'의 원인이 감기몸살 때문이 아니고 다른 데 있지 않을까?
12월에서 1월로 이어지는 두려움, 수면부족, 조바심 그리고 무력감. 햇수로 2년째 계속되고 있는... '분노' 때문일 지도 모를 일이다.

나오라는 인간은 나오지 않고
사는 맛 쓰는 맛 걷는 맛 온갖 맛 이런 젠장 다 떨어지고
돌아오라는 입맛은 돌아오지 않는다.
급기야 공포의 백골단을 앞세운 백골공주마저 출현하니, 아이고... 몰상식과 비정상의 난무에 정신마저 잃을 지경이다.

TV를 끄고 창문을 여니, 쨍한 바람과 시린 하늘이 꾸짖는다.
광장에서 거리에서 눈밭 속에서 목놓아 고생하는 사람들이 천지인데, 그런 날이 몇 날 며칠인데...

너는 고작 입맛타령이나 하고 있는가. 공동체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하지 못하고 방구석 분노만 일삼는 나에게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
쓰리고 쓰다. 입맛과 현실이.

냉장고를 털어, 엄니가 만들어 주신 동치미 한 사발 마셔본다. 미세하고 촘촘하며 시원한데 따뜻하며 선명하기까지한 사랑의 맛이다. 이 맛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아는 맛. 잃어버릴 수 없는 맛. 온 생애에서 잊지 못할 맛. 태초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맛이다.

아무리 지금이 괴로워도
잊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고 고이 품고 있다면
그래서 그것을 목놓아 함께 외친다면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입맛, 사는 맛은 한 모금 한 모금 돌아오리라.

그리 믿는다.
동치미는 희망이다.
술보다 세다.

우리네 희망을 믿는다.


#인천 #방구석 #감기몸살 #입맛 #사는맛 #어머니 #동치미
#걷기 #쓰기 #그리기 #희망 #바람이분다살아야겠다 #강신주 #왼손필사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