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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백

by 김호섭


정신과 의사 오은영 박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외로움을 느끼는 시기가 세 차례 있는데 20대 후반, 50대 후반, 80대 후반이란다.
20대 후반에는 취업, 결혼 등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따라오는 막막한 두려움, 50대 후반에는 '젊음이 끝나간다'

허무함, 80대 후반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구나'

라는 고독감인데 이러한 두려움, 허무함, 고독감을 하나로 퉁쳐서 외로움으로 느낀다는 말씀이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연령대별, 생애 주기별, 사회 문화적으로 세심하게 들여다보신 분석이다. 역시 박사님이시다.

공식적인 Ph, D. 박사학위는 없이 그저 척척박사 만물박사

로 동네에서 유명한 나는 오박사님의 분석에 이어 좀 더 세분화된 분석을 시도한다. 당돌한 그 시도는 잠시 뿐, 나의 오십 대 후반이나 찬찬히 돌아보자는 생각이 우선 앞장선다. 그럼 그렇지.




나인 미끌 퐈이브 꽈당. 아홉 번 미끌어 졌는데 다섯 번은 넘어지고 네 번은 살아남았다는 얘기다. 올 겨울 초보작가 허당 선생의 중간결산이다. 퐈이브 꽈당에 다소 울적하지만 그래도 예년에 비하면 준수한 성적표다. 게다가, 각 꽈당의 심각성 레벨도 그리 중하지 않으니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올 겨울나기다. 연아의 트리플 악셀에 뺨치는 공중 3회전의 묘기를 부리기도 하지만 '엄마'를 목놓아 외치며 매번 온몸으로 길바닥에 착지하던 예년의 처절 꽈당에 비하면,

올 겨울의 꽈당은 참으로 조신하고 얌전하며 감사한 꽈당 아니던가. 맛으로 치자면, 블랙 아이스드 위드 아메리카노처럼 '꽈당'마저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랄까.

'그나저나, 나의 겨울은 왜 이렇게 꽈당의 연속인가?'라는 생각의 불씨가 '내 삶은 왜 이다지도 실패와 고통의 연속드라마 인가?'로 옮겨 붙어 큰 불이 나려 하니 또또 우울해진다. 이럴 땐 일부러라도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 울적한 생각을 진화해야 한다. 밀림에서 사자에게 쫓기다 겨우 살아난 사슴이 생과 사의 지독한 스트레스를 털어 버리려는 특이한 자세에서 배운 잔기술이다. 이런 모습 하나만 봐도 나는 아직 인천 꽃사슴 꽃중년이 분명한데...

자세를 고쳐 잡아 책상머리에 앉는다. 이럴게 아니라, 나의 '꽈당'을 제대로 분석해 보자.

기본적이고 자명한 문제는 기초 체력이 심하게 떨어진 이유다. 한 바퀴에 오백 미터 정도되는 공원 산책길을 스무 바퀴 돌아도 크게 피곤하지 않던 체력이 오십 대 후반 즈음부터는 한 두 바퀴 돌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급격히 떨어졌다. 물 먹은 하마처럼 축축 처지는 발걸음은 어찌나 무거웠던지. 몸의 어딘가가 또 심하게 문제가 생긴 건가? 동네병원이나 인하대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해봐도 큰 이상은 없다는데 도대체 이 증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출산 후유증에 버금간다는 출간 후유증, 그리고 35년 직장인 나부랭이 시절을 마무리한 정년퇴직. 오십 대 후반과 환갑의 나에게 이런 사건들이 있었고, 참으로 맥없는 헛헛함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는데, 오은영 박사님이 그 원인을 규명해 주신다. 그래서 그랬구나. 외로웠구나. 허무했구나.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구나. 저 혼자 유별난 줄 알았구나. 젊은 작가님들과 어울리더니 자기도 젊은 줄 알고 착각하고 까불었구나... 몸보다 마음의 힘과 근육이 약해졌던 거구나. 몸과 마음이 따로가 아닐 터이니 몸마저도 힘들었구나.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아직은 아니라고 저 혼자 떼쓰고 어깃장 부려봐야 도도히 흐르는 세월의 강 위에 조그만 조약돌 던지기다. 인정과 반성, 그리고 성찰! 새로운 출발에 필요한 삼요소이려니 우선 인정부터 해야 하겠지.




진단이 나왔으니 이제 처방과 실행의 시간이다. 몸과 마음의 기초체력부터 다시 돌아볼 때이다. 어차피 닥칠 미래라면, 회피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다. 미래를 현재로 불러들여 미래를 대비해 보자. 과거가 현재를 살렸다는 한강 작가님 말씀처럼, 곧 과거가 될 현재가 나의 미래를 살릴 것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셋을 깨우치니 이 부분은 좀 제법이다) 인정할 건 겸허히 인정하고 피할 수 없는 건 넉넉하게 맞이하면 될 일이다. 노화는 죽음의 패러디라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젊음도 노화도 두려움도 허무함도 모두 '나' 일 테니, 내가 나를 선명히 바라보고 와락 끌어안고 사랑해야 할 일이다. 그럼 그렇고 말고.

뚜벅뚜벅, 인천시 중구 노인복지회관으로 향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 나의 노년을 주체적으로 긍정적으로 잡아보자. 보무는 당당하고 기세는 어흥이다. 설연휴가 끝났으니, 오늘부터 1일이다.

새파란 새내기 신입생 왔다고 어르신들이 반겨 맞는다. 난 어르신들의 강력한 포스에 기가 눌려 약간 쫄기도 하였고 또또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어흥이 웃을 일이다. 회원가입을 하고, 취미교실도 등록했다. 탁구와 기타, 그리고 어반스케치 강좌를 선택했는데 모두 대기순번이다. 뭐라도 하나 걸리겠지. 뭐라도 하나 배우겠지. 마음은 이미 넉넉하다.




책상머리에서 치열한 분석 끝에 내린 나의 선택은 역시 새로운 '배움'이다. 배우러 온 인생일 테니, 좋아하는 거, 하고 싶은 거 즐겁게 배워보자. 그리하여, 지덕체를 골고루 갖춘 넉넉한 할아버지가 되어보자. 하여튼 욕심만은 언제나 야무지다. 먹고 살 돈벌이 걱정은 언제나 하려나...

방구석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제 6학년 1반이 된 나를 다시 재정의 해본다. '인천 꽃사슴 꽃장년'으로... 너무 어르신 레벨은 아니니 '꽃노년'은 80대 후반에나 가서 명명키로 하자. 하늘땅 별땅 땅땅땅.




시점의 담백한 심정으로, 나의 '꽈당'이 제로 미끌 제로 꽈당으로 수렴되기를 바라진 않는다. 그런 '완벽'은 세상에 없다. 그저 삶의 길모퉁이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져도 우아한 미끌과 유연한 꽈당이 있길 바랄 뿐이다. 다시 일어설 척추와 툭툭 털고 일어설 내 속의 '나'를 잃지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나저나, 연아가 밴쿠버에서 트리플 악셀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오 년 전이다. 트리플 악셀 두 번이면 곧 삼십 년이다. 아이쿠야. 정신 똑바로 차리자.




바야흐로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급속도로 노인세대로 합류하는 시절이다. 그저 방구석에서 식구들에게 잔소리나 하는 역할보다는, 세상과 미래세대에 어떤 쓰임새로 봉사해야 할지 고민하고 실행해야 하는 책임이 무엇인지 숙고해야 함은 마땅하다. '나의 쓸모는 무엇인가?' 그간의 경험은 물론이고, 세상에 유익하고 의미 있는 무엇이든 새로이 배우고 익혀서 공동체와 나누어야 할 일이다. 날이 갈수록 점점 이런 생각이 많아지니 나도 슬슬 나이 먹어 가나 보다. 이제야 슬슬 철이 드려는 건 좋은데, 쓸데없이 말이 참 길다.

결론은 한 문장.
"어쨌거나 잘 늙어가자. 꽃사슴은 늙어도 예쁘다."
이런... 두 문장이네.
나이 들면 총기마저 흐려진다더니 그 말은 맞는 말 같다.


창문 틈으로 북풍한설 찬바람이 옆구리를 스치운다
이건 진짜 외로움이려나?

됐고, 별이나 보러 가자.


설 지나고

맑은 하늘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오늘의 독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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