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확신에 찬 판단을 자신했으나 그 판단이 섣불렀다는 사실을 마주 했을 때 우리는 종종 당황하게 된다.
그런 당황은 시간이 꽤 흐른 이후에 발생되는 경우가 많고, 아니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일말의 당황 없이 관계는 아스라이 세월 속에 묻혀버리는 경우도 당연히 많을 듯하다. 그런 관계는 그렇게 끊어진다.
어느 일방의 잘못된 판단이나 확신의 오류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관계는 그만큼 복잡하니까.인간사 참 복잡하니까.
내 생각이나 확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여지의 마음도 필요한 이유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여차저차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세상과 담을 쌓고, 벽을 치고,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사업실패라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사람에 대한 상처나 실망처럼 역시 관계의 문제는 쉽사리 치유되지 않고 폐쇄적으로 상황을 이끈다. 이런 경우를 접하는 이들은 대부분의 사회관계를 끊고 방구석에 처박히게 된다. 허당도 그렇다.
그런 허당이 아들 결혼식전에 지인들에게 모바일 청첩장을 열심히 돌리고 있다.
"아들 결혼식 손님은 아버지 지인들이고, 아버지 장례식 손님은 아들 지인들이다." 이 말의 무게는
방구석 허당의 아프고 허술한 몸을 끙차 영차 일으킨다.
첫 직장의 OB모임 단톡방에 모바일 청첩장을 올린다. 대략 1백여 명의 단톡방이다.
아무런 교류와 소통 한마디 없던 관계 속에서 갑자기 뜬금없이 청첩장을 올리는 일은 그야말로 민망 과 진땀 한가득이다. 그래도 무릅쓴다. 나는 아버지니까.
삽시간에 단톡방이 뜨거워진다. 축하로 도배되는 단톡방은 나의 시간을 순식간에 머나먼 과거로 데려갔고 나의 기억은 컬러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날아다니던 선배, 기어 다니던 후배,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외치던 동기들.... 모두 모두 정겹다.
이들의 기억 속에 허당이 아직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그저 잊힌 인물 중 하나이겠거니 했던 허당은 미소 짓는다.
뜨거워진 핸드폰이 차츰 식어질 무렵, 하나의 톡이 뜬다. "깨톡"
"자네 별명이 '깜짝새'였지?"...... 김 부장님이다. (김부장님이 누구인지 알려면 앞글 3. 칠월의 징글벨 참조)
- 앞글을 참조하러 가지 않을 독자들이 100 % 라는 걸 아는 허당은 요약을 단다. 참 다정하고 친절하다.
(요약)
김부장은 완벽주의와 카리스마로 똘똘 뭉친
언어폭력의 대가다. 신입시절 허당을 쥐 잡듯이 닦달했고
영혼마저 탈탈 털어대던 전산개발실과 운영실
공포의 부서장이다.
허당은 그에게 "머리가 스치로폴로 꽉 찼냐?"라는
야단을 맞고 자아는 붕괴되고 멘탈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찰진 요약 끝)
'헙' 허당은 단톡방에 선명히 새겨진 그분의 이름을 이제사 확인한다.
별명부자인 허당의 그 시절 별명은 "깜짝새"였다. 부장님이 참석하는 대부분의 회식, 술자리마다 무척이나 불편하고 힘들었던 허당은 중간중간에 도망 나오고 사라졌다. 이슬 9단 유단자로서 어느다른 술자리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이다. 50여 명의 직원 중 말단 신입 1명 정도 사라져도 무슨 표가 나겠나 하는 마음과 함께 술 먹다 도망갈 정도로 어지간하게 불편했다는 얘기이겠다.
'깜짝새'는 이런 허당의 불편한 마음을 간파한 사수 홍 선배가 유머를 곁들여 붙여준 별명이다. 이 홍 선배의 별명은 '홍반장'이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나타난다는... 실제로 그런다. 바람같이 나타난다.
홍반장 : "이 인간은 눈 깜짝할 새 도망가니 모두들 눈 부릅뜨고 술들 마셔야 합니다! 눈감으면 안돼요!"
홍반장이 매번 술자리 초반에 좌중 모두에게 선언한다. 그래도 만만치 않은 허당은 기가 막힌 타이밍을 잡아 도망가거나 사라진다.(마법사 최현우급이다.)
다음날 홍반장이 호출한다.
김허당 : '아니, 제발 님들끼리 마시라니까요... 제발'
홍반장 : "야. 너 없으면 술 먹을 맛이 안나. 까불지 말고 도망 좀 가지 마... 제발. 이 깜짝새야."
김허당 : "하다 하다 이젠 새됐네요."
그렇게 허당은 눈깜짤할새의 축약어 '깜짝새'가된다.
하여튼 징글징글하다.
김부장님의 톡이 이어진다.
"청첩장보니 아버지 닮아 아들도 잘 생기고 멋지구먼, 며느리도 이쁘고.
자네 결혼식 성당에서 했을 때 참 멋진 청년이었지. 자네 와이프도 무척이나 예뻤고.성당 오빠 ~ 축하여"
'헙헙헙...' 허당은 한동안 답신을 못하고 헙헙 거리기만 한다. 긴 호흡을 마치고 짧은 답신을 드린다.
"아... 김 부장님, 영광이지 말입니다. 깜짝새 올림."
낄낄 깔깔. 다시 난리 난 단톡방에서 어느 누군가
행여나 "부장님, 깜짝새도 맞지만 그전에는 스치로폴 킴이었죠" 이 말이 나올까 봐 허당은 잽싸게 마무리 인사하고 상황을 급 정리한다.
깜짝새는
다시 과거의 그 시절로 날아간다. 잊힌 기억들이 솟아오른다.
오돌뼈집에 김 부장님이 앉아있다. 그 앞에는 상당히 취한 허당이, 아니 이번엔 헤롱이 앉아있다.
홍반장이 마련한 독대의 자리다.
홍반장 : "부장님, 저 인간이 마상이 심했나 봅니다. 좀 위로해주셔야겠어요. 안 그러면 회사 때려치울 기세입니다."
이리해서 자리는 마련되었고,
황야의 두총잡이는 오돌뼈를 가운데 두고 대치한다.
김부장님 : 내가 화나면 말이 막 나오는 거 알지?
김헤롱 :......(아무리 그래도 스치로폴은 너무.,)
김부장 : 자. 한잔해.
김 부장님의 이런 한마디는 전례 없는 파격이다.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는 그만의 방식이다.
이럴 땐 사나이들은 마신다. 그리고 앙금은 풀린다. 그렇게 앙금은 풀리고 긴 세월이 흘렀다.
풀린 앙금보다도 상처가 더 컸던 것인가? 아니면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 오류 탓일까?
정답은 없다.
서로의 기억을 소환하여 재편성하고 재판단하는 수밖에. 내 결혼식을 30년이 흘러도 고스란히 기억도하시고.
마냥 악당으로만 기억했던 그도 심장이 뛰는 사람이었구나. 판단의 재편성을 감행한다.
김 부장님께 개인 톡을 보낸다.
"식 잘 치르고 이슬 한잔 올리겠습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깜짝새 올림"
관계 복원의 순간이고
나의 확신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배움의 순간이다. 타인의 판단이나 평가가 틀릴수도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