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남을까?"
신의 형벌이려나? 각자의 천수를 다하고 평안하고 자연스러운 소멸을 누리려는 인간의 보편적 소망이 뭐가 잘못되었다고, 그게 무슨 큰 욕심이라고... 신은 기어이 얄궂은 지팡이를 휘두른다. 무력한 인간 앞에, 우리네 일상 속에, 너무도 흔하고 치명적인 질병이 있다. "치매"
늘그막에 치매가 온 도린과 그녀의 가족 이야기. <앙드레와 도린>. 스페인 극단의 무언극. 지난 주말에 본 공연이다.
무거운 주제라는 걸 미리 알았음에도, 벌벌 떨리는 매서운 추위에도, 인천발 용산행 급행열차에 올라탄 나는 서울구경 처음 가는 시골 소년마냥 잔뜩 설레었다. 백만 년 만의 문화생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극이라니.
강남씨어터 3층. 매표장소에서 VIP석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글의 길에서 오래도록 연을 이어 온 백화 작가님이 준비해 주신 귀한 선물이다. 다짜고짜, 직원에게 말을 건넨다. "이 건물에 꽃집이 없던데 근처에 어디쯤 있나요? 꽃다발을 두 개 사야 하거든요. 이 공연의 총괄기획 정민경 감독님,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백화 작가님께 드려야 하거든요."
"글쎄요. 죄송한데 근처에 꽃집이 없어요." 잠시 난감해하던 직원이 한마디 덧붙인다. "이렇게 와주신 선생님이 꽃이세요. 다른 꽃은 필요치 않을 듯합니다."
꽃집이 없다는 상황에 당황하던 마음이 스르르 환해진다. 어쩜 이렇게 이쁜 말을...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젊은이가 분명하다. 그녀에게 "이렇게 낡은 꽃도 괜찮아요?" 꽃받침 포즈를 장착하고 한마디 했더니, 싱그러운 눈매와 미소로 환하게 웃는다. 백만 불짜리 미소다. 팔랑귀이면서 금사빠인 나는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면 며느리 삼고 싶도다!'라는 주책맞은 생각을 하면서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공간이다. 관객들이 들어서고 조명이 꺼졌다 다시 켜진다.
그저, 스토리텔링 분석이라는 (현재시점) 문학도로서의 시선과 저 가면은 어떤 재질로 만들었을지 궁금해하던 (청년시절) 물리학도였던 나의 얄팍한 관심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온전히 시공간에 몰입되는 무아경에 빠져든다. 무언극이니 만큼 침묵은 공간을 압도하고, 가면극이니만큼 표정은 시간을 해체한다. 몸짓으로 만들어진 소리는 문장으로 피어나고 아픔으로 날아와 먹먹한 감동을 전한다.
첼리스트였던 도린(아내)과 작가인 앙드레(남편), 노부부와 장년의 아들(이름모름). 세 사람은 작은 집에서 티격태격하며 일상을 공유한다.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의 장면은 도린이 초기치매증상을 보이면서 급격한 변화의 파도에 휩싸인다. 의사로부터 치매진단을 받고 증상은 더욱 악화되면서 여러 갈등과 장면들이 암전을 거듭하며 펼쳐지는데, 눈물을 참느라 혼이 났는데, 도린이 앙드레와 끌어안고 첼로를 연주하 듯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속절없이 울고 말았다. 한없이 과묵하고 무뚝뚝한 이 사내를 울리다니... 암전이 고마웠다.
초기 치매 같으니까 정식 검사받으러 오라는 보건소의 전화. 자꾸 넘어지고 기억은 가물해지고 단어와 문장을 잊어가는 우리 엄니. 명료했던 일상이 자꾸만 흐릿해지는 현실에 신경질만 잔뜩 내는 나. 살아 계셨으면 앙드레처럼 엄니를 포근히 안아주셨으리라는 아버지 생각에 이르니 목울대가 자꾸만 덜컥거린다.
무대 전면 중앙에 첼로 가방이 놓이고, 남은 가족들이 애도를 표한다. 앙드레가 가방 안에 넣은 빨간 쪽지, 기억은 사라져도 몸으로 연주하던 도린의 손등, 가족의 역사를 증명하는 사진들, 벽돌책만 저술하던 앙드레의 얇은 책. 이 모두가 상징하는 건 사랑이겠다. 기억은 사라져도 몸과 영혼에 남겨질 사랑이겠다. 신의 횡포에도 남겨질, 몸으로 마음에 새긴 진심... 인간의 현현한 존엄이겠다.
이미지와 상징, 생략과 비약에서 시를 보았고
섬세한 디테일에서 소설을 읽었으며
말없이 전하는 문장을 들었다.
설명 없이 전해지는 사랑의 본질을 경험한 귀한 날이다.
공연이 끝났어도 무대에 남겨진 첼로 가방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배우들이 관객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렇게 하나의 사물을 통해서도 여운이 가득하다. 미꽃체의 거장 백화 작가님과 훈남시인 이경선 시인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강남역으로 향한다. 추위가 더는 매섭지 않다.
인천행 열차에 올랐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한 가지 질문을 품고서,
"다가오는 이번 엄니 생신에는 꽃다발 한아름 안겨드려야지,
내가 꽃이니까, 삶이 꽃의 선율이니까."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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