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번째 외출 : 녹색 숲, 붉은 점

동백동산

by 김형우

4월의 봄날, 정말 오랜만에 제주의 숲을 찾아가 보았다. 동백동산.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만큼 생태학적으로 가치 있는 곳이면서,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 조용하게 찾아가기 좋은 곳이다. 안내센터에서 코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숲으로 들어선다.


동백동산은 제주에 분포된 곶자왈 중에 하나이다. 곶자왈은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암석지대 위에 형성된 제주의 독특한 숲을 가리키는데,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해 생태학적 보고와도 같은 곳이다.


동백동산 숲으로 들어서니 울창한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선선한 바람이 순환하며 다른 공간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준다. 나무들 사이로 간간히 스며드는 햇빛은, 역설적으로 이 숲이 얼마나 넓은 하늘을 가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짙은 녹색으로 가득한 이 풍경을 제대로 사진에 담고 싶지만, 그 느낌을 살리기가 참 어렵다. 첫째로는 스마트폰 카메라의 렌즈가 이 곳의 짙은 초록의 매력을 온전히 복사해내지 못하는 탓이고, 둘째로는 사방으로 가득한 녹색의 세상을 담아내기에 카메라의 시야각은 무척이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아쉬운 만큼 눈으로 확실히 담아두기로 하고 숲을 거닐어 보았다. 이끼를 입고 있는 돌들, 덤불이 엉킨 나무들, 곳곳에서 무성한 양치 고사리들, 이들 사이를 걸어가 본다. 숲길 초입부에 길 안내를 위해 깔려있던 야자수 발판은 어느새 사라졌고, 대신 조약돌이 가득한 길이 이어졌다. 발판의 편안함은 없어졌지만, 나의 걷기가 보다 자연과 가까워진 듯했다.


아참, 동백동산이라 했으니 동백꽃을 찾아보려고 하였으나, 생각보다 찾아보기가 힘들다. 사실 동백동산 이름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에서는 카멜리아 힐이나 위미 동백 군락지와 같은 동백 천지를 기대하고 갔다간 실망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동산이 이름값을 못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선흘 동백동산은, 특별한 방식으로 동백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동백은 숨겨져 있기에 더욱 특별하다. 이미 겨울이 지나 떨어진 꽃잎들도 간간히 보이는 가운데, 중간중간 동백나무에 남아있는 동백 몇 송이를 볼 수 있었다. 봉우리가 작은 동백꽃들은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조금씩만 볼 수 있었지만, 검은 돌과 녹색 초목의 향연 속에서 그 붉음을 수줍게 밝히고 있었다. 새카만 밤하늘에서는 북두칠성이 일곱 개의 점만으로도 주인공이 되듯이, 이 숲에선 동백이 그런 존재였다. 특별히 과시하지도 번영하지도 않은 채 제 위치만 겸손하게 지키지만, 그런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모습 덕에 만날 때 더욱 반가운 존재인 것이다. 이곳의 동백은 소박함이 주는 소중함을 아는 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동백동산이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의 동백은 숨겨져 있기에 특별하다.

봄철 동백 동산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낙엽이다. 돌멩이 길을 덮은 낙엽들은 천연 카펫이 되어 이 숲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겨울에 진 낙엽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가 싶었지만, 내가 숲을 다니는 순간에도 낙엽은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탐방이 끝난 뒤 안내센터에 여쭈어보니, 이 낙엽은 종가시 나무라는 도토리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특이하게도 봄에 옷을 갈아입는다고 한다. 숲의 선선한 기온 속에서 종가시 나무 낙엽이 흩날리니, 봄 속의 가을 풍경이 완성된 것이다.

봄의 동백동산에서는 낙엽이 지는 가을의 풍경이 연출된다.

숲의 절반쯤을 지나면, 이 숲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먼물깍 습지가 나온다.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먼물깍 습지에는 얕은 물이 고여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소박한 규모의 습지였지만, 물 위를 유유히 헤엄치는 소금쟁이와 물방개들을 보니, 숲 속 생물들의 아늑한 보금자리로 적당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숲의 나머지 절반은 아스팔트 길과 바윗길로 이루어져 있다. 유일하게 하늘이 열려있는 아스팔트 길은 주변 마을과 맞닿아 있는데, 초록 세상에서 잠시 나와 형형색색의 봄꽃들을 감상할 수 있다. 매화, 유채, 벚꽃 등 다양한 꽃들이 길을 장식한다. 한편 그곳을 지나 다시 숲으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바윗길은 지형의 고저가 심해 꽤나 난이도가 느껴지는 길이다. 하지만 그만큼 본연 그대로의 곶자왈을 누빈다는 기분을 얻을 수 있는 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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