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외출 : 시간이 멈춘 마을

성읍민속마을

by 김형우

성읍민속마을 주변으로는 제주 전통초가들이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고, 곳곳마다 전통체험이 가능한 집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이러한 집들도 성읍민속마을을 체험하는 좋은 방법이지만, 보다 잘 정비된 코스로 헤맴 없이 둘러보고 싶다면 성읍성 내부로 들어가면 된다.

공영주차장이 있는 남문에선 현무암 성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정의현 성벽으로, 이 성읍마을 일대를 둘러싸고 있다. 특유의 문장이 있는 깃발이 펄럭이는 와중에 성 입구로 들어서 본다. 제주 전통 초가가 빽빽하게 모여 있고 나름 잘 구획된 길이 동서남북으로 나있다.

정의현 성벽이 성읍마을 일대를 둘러싸고 있다.

이곳은 아직까지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기에, 모두 비슷한 집처럼 보여도 아무 곳이나 들어갈 수는 없다. 안내판에 문화재로 지정된 곳들을 찾아 조심스레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가장 처음 들어간 집의 이름은 고평오 고택이다. 문화재 이름에 옛사람들의 이름을 제대로 기록해주어 정겹기도 하고, 실제 거주자의 삶도 함께 기억될 수 있는 느낌이다.


고평오 고택은 안채와 바깥채가 있는 초가집의 전형이다. 이곳에서는 통시를 볼 수 있다. 흑돼지 모형이 귀엽게 자리 잡고 있는 통시의 용도는 다름 아닌 화장실이다. 옛 제주에서는 흑돼지를 집집마다 키웠고, 돼지우리 위에 돌을 쌓아 화장실을 만든 것이다. 객주 건물에선 외양간과 여물을 볼 수 있었는데, 겨울철을 대비한 흔적이다.


제주의 옛모습을 볼 때에는 부모님만큼 확실한 해설가가 없으니, 이번 관람에선 굳이 해설사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빈 건물에서 그 용도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 속에 얽힌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즐겁게 말씀해주시며 완벽한 해설가가 되어주셨다. 전통초가집의 지붕 짚 사이로 겨울철 참새가 웅크려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어디 가서 따로 듣겠는가.

성읍마을에는 제주 전통초가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길거리를 돌며 동네슈퍼, 식당, 기념품점, 카페 등 이곳에는 있을게 다 있다는 것을 보았고, 주택 집들에선 태연하게 빨래를 너는 주민 분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대개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어느 정도 크고 작은 개량이 되어있어 구분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문짝을 철제로 바꾸거나, 지붕을 슬레이트로 쳐놓거나, 약해진 돌벽을 시멘트로 메우는 등의 식이다. 이것들 역시 제주의 전통양식들이 근대화를 거치며 개량된 흔한 방법들이므로, 제주 전통가옥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마을의 중앙에는 빛깔 좋은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이것은 정의현 객사이다. 이곳은 중앙 관리가 내려왔을 때 머무르던 건물이다. 연회 장소로도 사용되곤 했던 객사는 전국적으로 형태가 비슷하다고 하다. 그래서인지 초가집이 즐비한 성읍마을 풍경에서 홀로 독특하게 튀는 느낌을 준다.

정의현 객사는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다

객사를 지나 걷다보니 마을 한 켠에서 신명나는 사물놀이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따라가보니 주말을 맞아 체험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넉살 좋은 이장님의 손에 이끌려 가볍게 투호놀이 체험에 참여하였다. 손에 화살촉을 가득 들고 덤볐지만 결국 한 개도 넣지 못하였다. 그래도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경쾌한 풍물소리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정의향교 예절관이었고, 주말마다 전통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향교의 교육기능을 체험의 장으로 이어오고 있었다. 팜플렛을 보니 지역청소년, 주민,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한자교실, 서예교실 등이 진행되고 있었고, 고전 인문서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는 듯 했다.


초가인 예절관 옆에는 향교의 본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성현을 모신 대웅전 옆으로 학문공간인 명륜당도 있었는데, 이렇게 나란히 배치된 것은 이곳 정의향교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주민 어르신 한 분께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향교에 대해 영어로 열심히 설명중이셨다. 그 친절함과 열정이 멀리서도 느껴져 괜시리 존경스러운 마음이 든다.

정의향교는 전통 문화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그 교육적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

향교를 나와 마을 북쪽으로 향하니 커다란 팽나무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척 봐도 몇백 년은 되었음직한 이 나무는 실제로 6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전통마을의 600년 된 팽나무는 마을에 운치를 더해주고 수호신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마을이 정말 오래되었음을 증명하는 인증서인 셈이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해가고 있지만, 그 모퉁이 한 켠에는 시계를 느리게 돌리며 옛 모습을 붙잡아두려하는 존재들이 아직 남아있다. 영원한 것은 없기에 이들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허나 이들이 미약하게나마 시계바늘을 늦추어준 덕에, 우리는 쉼 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한 숨을 돌리며 역사를 기억할 수 있고, 무엇을 남겨두어야 할 지 고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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