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과 4 사이
나에 대해 알고 싶은 시간 - 에세이
4월의 봄 안에서 겨울을 만났다.
자신의 전성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겨울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밖은 바람소리로 요란하다. 나무에 마지막까지 붙어 있던 꽃잎마저 떨어뜨릴 기세다. 전기장판 눈금을 3과 4 사이로 맞추고,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쉬이 오지 않는다. 머릿속은 파편이 된 여러 가지 기억들과 감정들이 함께 떠내려 왔다. 마음 깊은 곳에 이르자 가장 슬펐던 날에 대한 기억이 만져졌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곧바로 아이가 생겼지만, 결혼 전부터 해 오던 어린이집 교사 일은 하는 데까지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맡은 반은 여섯 살 ‘OO반’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할머니 혼자서 키우는 아이, 아빠가 홀로 키우는 아이, 다문화 가정 아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해맑았고, 나를 잘 따라 주었다. 더군다나 학부모들은 어린이집과 교사를 믿어 주어서 일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임신 초기라 유달리 입덧이 심했다. 구불구불 산복도로를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하루는 담백한 비스킷을 입에 물었고, 또 하루는 청포도 사탕을 살살 녹여 먹었다. 하지만 흔들거리는 버스를 따라 자꾸 속이 울렁거렸다. 도저히 참기가 힘들어 버스에서 내려 하수구에 토를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 토를 하고 출근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힘들었던 임신 초기를 보내고 나니 그 이후에는 한결 생활하기 수월해졌다. 어린이집 옆 계단을 오르내리며 아이들과 주변에 있는 공원과 시장으로 산책을 다녔고, 여름에는 조리사님이 해 주는 묵사발을 맛있게 먹었다. 점점 배가 불러왔다. 드디어 출산 예정일을 앞둔 만삭의 몸이 되었다. 짬이 날 때마다 출산 준비물을 하나씩 챙기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새 생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2007년 늦은 가을, 아침 공기가 유달리 차가워서 베란다에 놓아둔 국화 화분을 집 안으로 들여놓고 서둘러 일을 하러 나갔다. 아직 밖은 찬 기운이 느껴졌지만, 교실 안은 햇살이 들어와 눈이 부셨고 따사로웠다. 아이들이 노는 소리가 물방울 튕기는 소리처럼 경쾌했다. 낡은 CD 플레이어에서 잔잔한 피아노곡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로운 토요일 오전이었다.
나는 짬이 날 때 정리하려고 바구니에 넣어 두었던 아이들의 미술 작품을 파일에 하나씩 넣고 있었다. 그때 걸려온 한통의 전화......, 언니였다.
“아부지가......,”
똑 부러지는 성격의 언니가 말끝을 흐렸다.
“아부지가 왜?”
나는 다그쳐 물었다.
“아부지가 아침 드시기 전에 하우스 논에 일하러 가셨다가 경운기 사고가 나서 그만 돌아가셨단다. 흑흑흑”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소식......,
한 순간에 일상의 필름이 끊어져 버렸다. 아이들의 노는 소리도 감미롭게 들리던 피아노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하얗게 질려 떨리는 손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했고, 구불구불 산복도로를 지나 집으로 돌아와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과 안타까움과 먹먹함에 한없이 울었다. 고속도로 터널을 지날 때 차창 유리에 울고 있는 검은 아이가 비췄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엄마를 만났고,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보았다. 이게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좌절하고 오열하였다.
내 편,
나를 믿어주셨던 분,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셨던 분
내게 붕어빵을 건네주고, 알사탕을 챙겨 주셨던 다정한 그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버지!!!
남산처럼 부른 배가 점점 단단해지면서 아파왔다. 나의 슬픔에 뱃속의 아이도 슬퍼하고 있었다. 남편도 친정엄마도 자꾸 뱃속의 아이부터 챙기라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는데 뱃속의 아이를 위해 끼니를 챙겨 먹고 있는 내가 너무 싫었다. 나는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불쾌하고 치가 떨렸다.
소중한 아버지를 보내고 얼마 후 나의 첫 아이가 태어났다. 새 생명을 만나 너무도 가슴 설레고 기뻤다.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아 마음껏 기뻐할 수 없었던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온몸으로 아이를 사랑해 주지 못하였다. 나는 베란다에 나와 얼어버린 국화꽃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아기가 자다가 깨서 배고파 울면 눈물을 훔치고 가서 젖을 먹였다.
나는 그동안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온전하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너무나 낯선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에 내 아이를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서툴게 아버지를 보내드린 미안함 때문이었으리라.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지쳐갔던 2007년, 1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때의 슬픈 기억을 끄집어내고 이렇게 말해 본다.
삶과 죽음은 늘 함께한다고......,
(2019. 04. 11)
<작가의 말>
너무나 갑작스럽게 맞이한 친정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나의 첫 아이와의 만남......,
복잡하게 엉켜버린 마음을 정리할 새도 없이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며 정신없이 삶을 살아내야 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도서관에서 하는 글쓰기 강좌에 참여하게 되었고, 12년 전 가장 슬픈 감정과 가장 기쁜 감정 사이에서 허우적댔던 저를 보게 되었답니다. 글쓰기를 통해 복잡했던 감정들이 조금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삶과 죽음에 대해 더 성숙해지고 깊어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