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물꽃 Oct 09. 2023

여름휴가_04

가을이 되었지만 끝나지 않은 여름휴가 이야기

카페를 나오고 나서부터는 대부분을 즉흥적으로 움직였다. 가족들을 위한 기념품을 사게 된 것도 계획한 건 아니었다. 강릉에 몇 번이나 가봤으면서 강릉샌드라는 나름의 명물을 산 건 처음이었다. 가성비가 좋은 편은 아니라 형부 선물과 가족들 몫까지 세 박스나 살 때는 조금 망설여지긴 했다. 하지만 동네 주민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신 사장님이 좋았고 집에 가서 맛보니 생각보다 더 맛있어서 사라지는 게 아쉬울 정도였으니 괜찮은 소비였다.


가족들을 위한 선물을 고른 다음엔 내 취향의 기념품을 사러 갔다. 원래는 기념품샵과 카페를 같이 운영한다는 곳을 가려고 했다. 여행지를 기억할 수 있는 악세서리나 엽서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데 이번 여행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들떴다. 버스에서 내리고 미리 알아둔 것처럼 지하로 내려가려는데 길이 막혀있었다. 카페는 운영하고 있지만 기념품 샵은 쉬는 날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갈 곳을 잃어버렸다. 급하게 가까운 기념품샵을 검색해봤지만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날은 더웠고 기념품을 미리 사둔 탓에 짐도 한가득이었다. 일단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에 다른 정류장으로 향하다가 엄청 조그마한 기념품샵을 찾아냈다. 아까 서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했다.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알람에 급하게 뛰어봤지만 눈앞에서 버스를 놓쳐버렸다. 


사실 너무 뜨거운 날씨에 욕을 뱉을 뻔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리 급할 것도 없었다. 버스는 길어봐야 10분 안에 온다고 되어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버스가 도착했다. 이번엔 다행히 제대로 영업하는 기념품샵이었다. 오히려 아까 가려고 했던 곳보다도 내 취향의 엽서들이 많았다. (가게는 오아스라는 곳이다.)


사고 싶은 게 가득이라 고르는 데 한참 걸렸다. 특징을 말하자면 일상 속에 어떤 순간을 포착해 의인화시킨 동물이나 사물이 등장하는 그림이 많았다. 여러 개 사봐야 집에서 붙일 수 있는 공간은 한정돼있으니 욕심을 덜자고 마음먹어봐도 버려지지 않았다. 결국 5개 정도를 구매하고서야 기념품샵에서 발을 뗄 수 있었다. 사장님에게도 괜히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려보기도 했다. (평소엔 사람들과 별로 말을 섞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여행지에서는 왜 이렇게 인싸가 되는지 모르겠다.)


다음 행선지도 정해져있지 않아 그 자리에서 갈 곳을 결정했다. 지도를 보니 근처에 미술관이 있었다. 마침 입장료도 무료였고 전시회도 진행 중이라 그곳을 가보기로 했다. 하필 언덕길 위에 자리하고 있어 짐을 한가득 매고선 낑낑대며 올라갔다. 겨우 도착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계획하지 않으니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전시는 자폐증을 가진 이장우 작가의 유화 그림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그림 전시를 보는 걸 좋아하지만 아무 정보도 없이 보게 된 거라 사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보다 보니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장우 작가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단풍을 단풍꽃이라 말한다며 작가에게 단풍은 낙엽이 아니라 꽃이라고 인터뷰한 글귀가 있었다. 그 말이 작가의 전시를 대표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작가는 고흐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는데 사실 처음엔 고흐 그림과 차별화되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히 나를 붙잡는 그림이 있었다. 아몬드라는 작품이었다. 


고흐의 작품에도 아몬드 나무라는 그림이 있다.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았기 때문인지 드물게 고흐의 작품 중에서 나름대로 밝은 느낌의 그림이긴 하지만 고흐의 생애를 알아서 그런지 난 그 그림을 보면서도 어딘가 아린 구석이 있었다. 분명히 따뜻한 분위기인데도 이런 행복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다. 나만의 느낌이지만 고흐의 그림을 볼 때면 항상 그렇게 언저리에 깔린 슬픔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장우 작가의 아몬드라는 작품은 아버지가 말했던 단풍 이야기처럼 모든 아름다움이 그림에 담겨있는 거 같았다. 작가는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구나 싶었다. 아몬드 나무 하나로 세상이 이렇게 반짝거린다고 느껴질 수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스탕달 신드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작가의 그런 시선 때문인지 괜히 눈물이 날 거 같았다. 꼭 이 그림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작품이 그랬다. 세상의 어수선함도 작가의 눈을 통한다면 모두 빛이 날 것 같았다.


아무 정보가 없었던 덕분에 좋은 그림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입장한 사람도 나를 빼고는 한 커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전시회를 안내해주신 직원분께서 짐을 맡기는 방법도 알려주셔서 아주 편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전시회를 나오고서는 밥을 먹기로 했다. 사실 이때는 원래 가려던 곳이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알아봤던 도넛 가게였는데 힙하게 생긴 공간인 데다가 맛도 다양해서 방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카페에서 이미 푸딩을 먹다 먹다 남겨서 그런지 단 음식은 더 들어갈 거 같지 않았다. 사실 그리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간단히 때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대충 검색을 해보다가 도넛 가게보다도 더 가까운 강릉시장에 가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버스가 도착했다.


강릉시장이라고 한다면 정말 자주 방문했던 곳이다. 감자전, 닭강정, 호떡 등 웬만한 건 다 먹어봤던 것 같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 왔었기 때문에 혼자 찾아간 게 처음이긴 했다. 배가 엄청 고픈 건 아니라 대충 길거리에서 전을 파는 곳에 앉아 막걸리 한 병을 시켜 느긋하게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도무지 그런 분위기에서 전을 파는 곳이 없었다. 다행히 코로나가 풀리면서 시장 한복판에 놓여있던 테이블에선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시장에서 서성거리며 전집을 찾았다.


유명한 곳을 물어물어 찾으려다가 어렵게 알아낸 곳은 오늘 쉬는 날이었다. 더위는 여전했고 배고픔 때문이 아니어도 이러다 정말 기절하겠다 싶어 이제부터는 대충 파는 곳을 발견하면 바로 구매하자고 계획을 바꿨다. 처음 시도해보는 메밀전과 호박식혜를 사들고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계획하지 않은 식사였는데 사실 맛은 있지 않았다.ㅎㅎ.. 강릉에서 먹었던 것 중에 가장 맛있었던 건 순두부뿐이었던 게 아쉽긴 했다. 세 조각 정도 먹으니 입이 물려버렸다. 여행지에서 살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건 음식 덕분이기도 했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한창이라 오늘 반드시 여름휴가 포스팅을 끝내려고 했건만 아직 할 말이 안끝났다. 다음번엔 꼭 마무리 짓는 걸루.. 

작가의 이전글 월말정산_09_0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