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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물꽃 Oct 23. 2023

여름휴가_06

사랑할 준비가 끝났다

바닷가로 나가려면 숙소에서 꽤 걸어야 했다. 일출은 6시라고 했고 5시 30분쯤 숙소에서 나왔으니 서둘러 걸으면 얼추 맞을 것 같았다. 밖은 깜깜했고 날은 쌀쌀했다. 가지고 온 옷이 얼마 없어 어제 불멍부터 잠옷으로까지 사용한 셔츠를 걸쳐 입고 있었다. 풀 숲을 지나서 길을 걸어가는데 혼자였다면 좀 무서웠을 것 같았다. 멀리서부터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해 뜬 거 아니에요?” 서로 물어보며 각자의 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다행히 바다가 보이고 모래사장을 밟기 시작했을 때도 해는 뜨지 않았다. 


바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되도록이면 물을 적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바라만 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당장에 양말을 벗고 바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쌀쌀한 날씨와 달리 바다는 그리 차갑지 않았다. 이미 첫날에도 발을 담갔었지만 아침의 바다는 뭔가 특별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일출을 보러 온다는 것도 낯선 경험이었다. 새로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6시가 다 되어가는데 해가 뜨지 않았다. 딱 해가 떠오르는 위치에 구름이 껴있었다. 이미 떴다고 해도 잘 모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걱정이 되긴 해도 당장에 할 수 있는 건 그냥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꽤 걸릴 거 같아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모래사장의 모래는 한껏 축축했고 그곳에 닿으면 무조건 젖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지만 망설임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서 서성이던 분들도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앉아서 기다렸다.


총 다섯 명이서 일출을 보러 왔지만 두 사람은 친구였는데 두 분이서 한참 걸어 나가더니 내가 있던 곳에서는 좀 멀어지게 됐다. 나는 나와 동갑인 분과 어제 만난 중학생 손님과 함께 일출을 기다렸다. 중학생 손님은 모든 경험이 처음이라며 행동 하나하나에 기뻐했다. 그 들뜬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내 16살은 외고를 준비하며 치열하게 생활했던 시기였다. 그 시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때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순간을 즐기기보다는 미래를 불안해하며 살았다. 동갑인 손님과 참 좋을 때다 하고서 바라보는데 새삼 그때보다도 많이 살아왔구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내가 서른이 되는 모습을 자주 떠올린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지금의 나도 나쁘지 않았다. 16살에는 겁이 많았다.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기보단 숨기는 편이 편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열심히 살아갈 동력을 낼 거라고, 불안해하지 않을 거라고 믿게 됐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미래의 어느 순간 돌아보면 참 빛나는 나이였다고 바라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동갑이었던 손님은 어제 간략하게 나이 소개를 하다가 알게 됐다. 나 혼자서 만 스물아홉이라 소개한 직후였다. 그분만 나를 따라 만 나이로 이야기했는데 계산해보니 나와 같은 94년생이었다. 동갑인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나이만 듣고도 너무 반가웠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나와는 전혀 다른 직군의 일을 하는 사람이어서 더 궁금하기도 했다. 여행지가 아니라면 만나볼 수 없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작년에도 강릉에 온 적이 있었지만 그건 최악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바로 전남친과 함께 떠났던 여행이었다. 발가락이 부러지고 다 낫지도 않은 내게 제주도를 가자며 보채는 게 지겨워 타협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을 일종의 과제처럼 여겼고 강릉이라도 다녀오면 당분간은 쉬어도 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떠나기도 전, 피로도가 높았다.


나는 늘 전남친과 함께 있으면 불편함을 느꼈다. 같이 있으면 빨리 집에 가고 싶었고 데이트가 끝나는 순간을 기다렸다. 같이 있자고 붙잡으면 피곤함이 몰려왔다. 각자의 시간을 보낼 때만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었고 데이트 약속 잡는 걸 업무처럼 여겼다. 사실은 그러는 동안 나는 누군가와 연애할 수 없는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전남친과 헤어지고서 누구를 새로 만날 기회도 없었지만 굳이 연애를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편으론 두려움이 많이 남아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편하게 이야기하면서 연애 감정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준비가 됐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정말로 준비가 됐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 불안함을 이 손님과의 대화로 풀어나가게 됐다. 특별할 게 없는 아주 사소한 대화였다. 우리 나이에 맞는 아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오히려 너무 평범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우리 언니가 결혼한다는 것도, 언니가 아이 낳을 생각이 없었는데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처음 본 사람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는 거리감 때문이 아니었다. 서로에 대해 아는 건 나이와 직업이 전부였지만 이야기를 하는 내내 마음이 편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됐다는 게 느껴졌다. 언제라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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